1937년 처음 비편이 발견된 이후 1977년까지 비편 59개가 수습되었다.
흥덕왕릉비의 제작연대는 흥덕왕이 죽은 836년 쯤으로 추정되며, 구양순의 해서체로 되어 있다. 1957년 발견된 비편에서 예서체로 '흥덕(興德)'이라 쓰여진 부분이 판독되어 제액으로 보고 있다. 비문은 각 행에 2~3자 정도이고, 문맥상 연결이 되지 않아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비편 가운데 '貿易之人'이라는 글자가 확인되어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추정하는 데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828) 등 대외교역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사회분위기와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또한, 비편에 새겨진 '太祖 星漢'이라는 비문을 통해 신라 중대의 왕실이 성한을 자신들의 시조로 모셨음을 알 수 있고, 흥덕왕의 생몰년과 책봉시기 등을 알 수 있다.
추가적인 발굴이나 발견이 없고, 비문의 해독 역시 큰 진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비의 귀부(龜趺)만 남은 채 비편이 산발적으로 발견되었지만 비문을 통해 비석의 주인공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를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