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진이 사료상 처음 보이는 곳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 탈해니사금 21년 가을 8월조이다. ‘아찬 길문(吉問)이 가야 병사와 황산진 어구에서 싸워 1천 여 명을 잡았다’라는 기사에서이다. 여기에서의 가야는 경상남도 김해에 존재했던 금관가야이다. 지마니사금 4년 7월조에는 신라와 가야가 황산하(黃山河)를 중심으로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이 보인다. 이로 보아 황산진은 낙동강을 중심 무대로 하여 교역활동의 중심세력으로 존재했던 김해의 금관가야와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신라가 지속적으로 쟁탈전을 펼친 곳이었다. 이곳은 낙동강 중·상류로 가는 길목임과 동시에 바다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산진이 탈해니사금 21년, 즉 1세기 초부터 존재했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삼국사기 초기 기사의 기년을 그대로 믿는 연구자들도 있지만 문제가 있다고 보는 연구자들도 많기 때문이다.
황산진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0 희강왕 2년 5월조에 또 한번 등장한다. ‘우징이 자기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처자와 함께 황산진 어구로 달아나 배를 타고 청해진 대사 궁복에게 가서 의탁하였다’라는 기사에서 이다. 이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황산진은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낙동강의 하구로 나아가 바다로 나아가는 곳이기도 하였다.
조선전기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와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 황산진이 보인다. 『경상도지리지』 경주도 양산군 대천조(大川條)에서 ‘낙동강이 흘러 군 서쪽의 황산진이라고 칭하는 곳에 이르고 다시 서남쪽의 동원진이라고 칭하는 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전한다. 또 사방계역조(四方界域條)에서 ‘서쪽으로 김해부의 경계인 황산진까지 17리이다’라고 하였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서는 '황산진이 양산군이 아니라 김해도호부의 동쪽에 위치하였다'고 하고 있다. 이로 보면 황산진은 낙동강의 동쪽과 서쪽의 양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서쪽의 황산진 위치는 잘 알 수 없으나 동쪽은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 황산역터 근처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