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전시경제체제로 돌입하자 조선총독부는 일본에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제적인 저축운동을 전개하였다. 저축은 일신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국가를 위한 애국적 의무로서 각 개인에게 할당되었으며, 저축액의 할당과 회수를 위한 실행 조직으로 저축조합이 설치되었다. 저축운동은 행정조직을 비롯한 각종 관변 조직과 금융기관을 총동원하여 실시되었다.
조선총독부가 강제저축운동을 추진한 것은 군사비와 시국산업 육성을 위해 살포된 거액의 자금을 흡수함으로써 물가 상승을 억제하고 또한 공채 소화(消化)와 생산력 확충을 위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총독부는 1938년 4월에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하는 저축장려위원회(貯蓄獎勵委員會)를 설치하고 이 위원회를 통해 저축 장려의 기본 방침을 결정하였다. 실질금리가 마이너스이고 소득수준도 낮아 자발적인 저축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저축운동은 처음부터 강제저축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저축조합이 결성되어 공공단체, 회사 및 상점, 그리고 부락 단위로 조직되어 강제저축운동을 조직적으로 실행하였다. 1940년 말에 저축조합 수가 약 9만 4000개, 조합원 수는 약 447만 명이었다.
국민총력연맹(國民總力聯盟) 창설 이후에는 저축조합이 연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저축 목표 달성을 독려하였다. 저축 목표는 각 도별로 할당되고 그것은 다시 시‧군‧읍‧면에 재 할당되었다. 저축조합은 1941년 10월에 공포된 「조선국민저축조합령(朝鮮國民貯蓄組合令)」에 따라 법적 단체가 되어 총독부의 저축 정책을 집행하는 기관으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강제저축으로 인해 저축조성운동은 매년 목표액을 돌파하는 실적을 보일 수 있었다.
저축조성운동은 처음에는 소득 증가분의 저축과 물자 소비 절약을 통한 저축을 기본 방침으로 하였으나 1939년부터는 저축을 증가시키기 위해 강제저축을 추진하고 저축조합을 조직적으로 강화하기로 하였다. 강제저축의 방법에는 천인저금(天引貯金)[공제저금: 임금이나 급료 지급 전에 미리 일정액을 제함], 농림 수산물 공판 대금의 통장 입금, 구매‧유흥 저축, 감사 저축, 근로자의 직역(職域)저축, 사행심을 이용한 저축 등이 있었다. 총독부는 강제저축을 통해 민간의 자금을 흡수함으로써 전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전시 자금을 조달하였다.
자금 측면에서 보면 중일전쟁 이후의 군수 공업화 정책은 국민저축조성운동을 통한 자금 형성, 임시자금조정법(臨時資金調停法)을 통한 자금 배분, 저금리정책을 통한 양질의 자금 공급이라는 세 가지 정책이 어울려서 수행될 수 있었다. 국민저축조성운동은 전시경제체제 하에서 전비를 조달하고 이미 살포된 자금으로 인한 물가상승을 억제한다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식민지민에게 강제된 저축운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