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 초기에 조선의 대일 수출품은 우피가 중심이었으나 일본의 흉작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1889년부터 조선 미곡의 대일 수출이 급증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공업화가 시작되고 도시 인구가 증가하면서 쌀의 부족이 초래되어 조선 미곡이 구조적으로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이를 배경으로 일본으로 수출되는 조선 미곡의 거래를 목적으로 인천미두거래소(仁川米豆去來所)가 설립되었다.
설립 취지서에 의하면, 미곡의 표준가격 및 품질 확립을 통해 미두(米豆) 매매를 원활하게 하고 미두의 표준품 거래를 통해 품질 개량을 촉구하며, 표준가격 설정을 통해 동업자 간의 미두 매집 경쟁의 폐해를 방지하는 것이 설립 목적이었다.
미두거래소는 1896년에 일본 영사의 인가로 설립되었으며, 시장 분규로 해산 명령이 내려졌으나 1899년 6월에 다시 재개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로 일시 폐쇄되기도 하였으며 이후 영업이 쇠퇴하면서 휴업을 하다가 1910년 3월에 영업을 재개하였다.
한일합병 후에 일본에서 조선 미곡에 대한 이입세가 철폐되고 오사카 도지마(堂島)의 미곡 중매인의 지위가 안정되면서 인천미두거래소는 호황을 보였다. 1918년에 일본에서 미가 폭등으로 인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자 조선 총독은 인천미두거래소의 매점 행위를 조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거래 증거금 관련 손실이 막대함이 드러나자 거래소 임원을 총독부 추천 인사로 경질하는 혼란도 있었다. 1931년 5월에 「조선거래소령(朝鮮去來所令)」이 시행되면서 미두거래소는 경성주식현물거래시장과 합병하여 조선거래소의 인천지점이 되어 미곡의 청산거래(淸算去來)를 담당하였다.
인천미두거래소는 미곡 외에 대두, 명태, 석유, 면사, 옥양목, 목면의 7개 품목을 거래 가능 품목으로 지정했으나 나중에 대두 거래가 일부 추가되기 전까지는 사실상 미곡 거래에 국한되어 있었다. 미곡 거래 규모는 오사카와 도쿄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교토, 고베, 나고야 등의 거래소와 비견할 정도였다. 미곡의 거래 방식은 일본의 거래소에서의 선물청산거래와 같았다. 미두거래소 주변에는 중매인 뿐 아니라 투기꾼들이 모여들었다. 일본 상인은 미두거래소를 통한 미곡 무역을 매개로 하여 인천의 상권을 장악하였으며, 약간의 조선인 토착 자본이 거래소에 유입되었다.
인천미두거래소는 대일 미곡 수출을 통해 조선의 농민에게 잉여 미곡의 상품화를 통한 잉여 축적의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조선의 미곡시장을 오사카 미곡국제시장과 통합하는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