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백 3·1운동 ( )

근대사
사건
1919년 3월 중순부터 하순에 걸쳐 황해도 연백군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1919년 3월 중순부터 하순에 걸쳐 황해도 연백군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내용

연안면에서는 기독 교회가 주도하여 시위를 계획했다. 2월 28일 서울로부터 온 약 100장의 독립선언서를 받은 손창현(孫昌鉉) 목사는 곧바로 시위 준비에 들어갔다. 각 면이 날짜를 정하여 연안면을 향해 행진하는 방식의 시위를 준비했다. 만세 시위 날짜는 봉북면, 호동면, 호남면, 해성면 순으로 정해졌다.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과정에서 3월 2일 경찰에 발각되는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시위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3월 15일 제일 먼저 봉북면에서 시위 군중이 연안면 동문 쪽으로 행진했다. 이튿날인 16일에는 호동면의 시위 군중이 연안면의 남문 쪽으로 행진했다. 헌병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시내 진출에 성공했다. 18일 장날에는 호남면과 해성면 시위 군중들이 연안면 서문 쪽으로 행진했다. 여기에는 해성면의 면서기와 구장들도 참가했다. 이 날 장터에 모인 시위 군중은 2000여 명을 넘었다. 21일에도 연안면에서 2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3월 23일에는 해월면 백란리에서 기독교계 학교 교사와 이장이 주도하는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같은 날 벽란도에서도 기독교계 학교 교사와 학생의 주도하에 10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3월 24일에는 유곡면 금곡리에서도 태극기를 들고 나와 독립 만세를 불렀다.

3월 30일에는 배천면 연남리 장터에서 창동학교 교사인 송흥국(宋興國)·이정식(李廷植)의 주도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 군중이 1000여 명으로 늘어나자 경찰이 발포하여 강제해산시켰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다음날인 3월 31일에는 유곡면 영성리에 있는 홍현시장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운산면에서는 면 직원이 주동한 시위 행진이 있었다. 은천면 옥산리에서는 헌병분견소 습격을 기도했다.

의의와 평가

연백군의 삼일운동은 기독교가 중심이 되었으며, 연백군의 각 면을 총괄하여 기획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봉북면, 호동면, 호남면 해성면이 차례로 시위에 들어가 연안면으로 집결되게 하였다. 이후에도 3월말까지 해월면 백란리, 벽란도, 유곡면 금곡리, 배천면 언남리, 유곡면 영성리, 운산면, 은천면 옥산리 등 연백 전 지역에서 만세 운동이 끊이지 않았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3․1운동Ⅰ-중부․북부』(김정인·이정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독립운동사』 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집필자
김정인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