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에서는 3월 1일 서울과 동시에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1운동 사전 모의에 참가했던 남촌동(南村洞) 남감리교회 목사 정춘수(鄭春洙)가 계획한 시위였다. 서울로부터 온 특사에게 독립선언서 300매를 받은 후 2월 28일 밤에 교인들을 모아 태극기를 만들고, 시위 대열을 인도할 책임자를 정했다. 함흥에도 사람을 보내 시위 계획과 독립선언서를 전했다.
3월 1일은 원산의 장날이었다. 오후 2시 각 교회에서 만세 시위를 알리는 종이 일제히 울렸다. 13명의 주동자들은 각각 예정된 장소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군중과 함께 장촌동(場村洞) 시장으로 행진했다. 시위 군중은 소방 호스로 물감을 뿌리고 공포를 쏘아대는 경찰에 맞서 어두워질 때까지 시위를 벌였다. 이날 만세 시위에는 약 2000명이 가담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사람은 50명에 달했다.
시위 주동자들이 기소된 사실이 알려진 3월 18일, 분노한 주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만세 시위가 다시 일어났다. 순식간에 천도교인을 비롯하여 1000여 명이 모여 시위행진을 벌였다.
4월 5일에는 김진수(金鎭洙)의 주동으로 상점들이 일제히 문을 닫는 철시 투쟁이 일어났다. 무언의 독립 시위를 벌인 것이다.
원산의 삼일운동은 기독교계에서 주도를 했으며, 3월 1일부터 4월 초까지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원산의 만세 운동은 3월 1일에 서울과 동시에 일어남으로써 함경남도 각 지역의 만세 시위를 촉발하는 자극제 역할을 했다는 점에 특히 의미를 둘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