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령 3·1운동 ( )

근대사
사건
1919년 3월 6일부터 4월 초순에 걸쳐 황해도 재령군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목차
정의
1919년 3월 6일부터 4월 초순에 걸쳐 황해도 재령군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내용

최초 시위는 3월 6일에 남률면 해창리에서 기독교인의 주도로 일어났다. 해창리 출신으로 오산학교를 다니던 윤택진(尹澤振)이 귀향하여 시위를 준비했다. 해창리의 기독교인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자신의 집에서 태극기 수백 장을 그렸다. 함께 모의하던 동지가 체포되는 바람에 예정보다 이른 3월 6일 밤에 시위를 감행했다. 한 때 시위 군중이 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점령하기도 했다.

재령면에서는 장날이자 일요일인 3월 9일에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재령면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3월 3일이었다. 당일 오후 3시 반쯤 기독교인과 천도교인 5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감행했다. 시위행진 중 군중이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3월 10일 북률면 내종리 장날에는 기독교인이 주도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1000여 명이 넘는 시위 군중이 헌병주재소로 몰려가자 헌병이 발포하여 1명이 즉사했다. 3월 28일에는 상성면 청석두리에서 교사들의 주도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4월에 들어서도 곳곳에서 시위가 계속되었다. 4월 2일에는 재령면에서 명신학교와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일으켰다. 4일에는 남률면 해창리에서 장날을 맞아 시위가 일어났다. 5일에는 하성면 신덕리에서, 7일에는 재령면과 서호면 신환포리에서, 9일에는 은룡면 신유리에서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의의와 평가

재령군의 삼일운동은 기독교와 천도교 인사들 및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다. 3월초부터 4월 초까지 한 달여에 걸쳐 일어났으며, 시위대의 숫자가 1000여 명, 2000여 명 등으로 대규모였다는 점도 특징이다. 남률면 해창리, 재령면, 북률면 내종리, 하성면 신덕리, 서호면 신환포리, 은룡면 신유리 등 각지에서일어났으며, 특히 재령면에서는 3월 6일, 4월 2일, 4월 7일 등 3차례에 걸쳐 시위가 일어나 재령군 삼일운동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독립운동사자료집』 6(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3․1운동Ⅰ-중부․북부』(김정인·이정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독립운동사』 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집필자
김정인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