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9월 농상공부와 부산항 감리서의 인허를 받았다. 지점은 함경도 함흥·홍원·북청·이원의 4개 군에 두었는데, 이 4읍(邑)이 대표적인 북어 산지였기 때문이다. 사원은 고경필(高敬泌), 김종현(金宗鉉), 최군천(崔君天), 김영목(金泳睦), 박영규(朴永奎), 이면순(李冕純), 최창균(崔昌均) 등이었다.
창흥사는 강령에서 대한협동우선회사와 교섭하여 운수(運輸) 문제를 처리한다고 했는데, 당시 대한협동우선회사는 정부의 관판(官辦) 회사로서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국적(國籍) 선사(船社)를 이용하여 화물을 운송함으로써 민족자본의 상생(相生)을 도모한 것이다.
창흥사의 민족주의적 성격은 사원들의 사회 활동에서도 잘 드러난다. 농상공부와 부산항 감리서의 인허를 받은 직후 창흥사 사원들은 『대한매일신보』가 민중을 계도하여 문명의 영역으로 이끌고 민족의식을 격발시키는 데 감사한다며 10원을 기부했고, 부산의 사립 정정의숙(貞靜義塾) 설립 자금도 일부 부담했다. 특히 국채보상운동 때에는 본사와 지사 사원들이 각각 별도로 거액을 의연(義捐)했다.
국채보상운동 이후 관련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1909년께 소멸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