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공호(黃公浩)는 평안남도 평양(지금의 평양특별시)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1년 105인사건이 벌어졌을 때 신민회 회원 옥관빈(玉觀彬)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뒤 독립운동을 모색하는 한편, 국내 인사들과 연결되어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선전물을 국내에 발송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19년 3 · 1운동이 발발하자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임시의정원의 중국 지역 대표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의정원의 세칙 개정과 위원 선출, 임시정부가 제출한 국채통칙(國債通則) 및 국채발행조례(國債發行條例) 등을 결의하며 활발하게 의정원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임시정부 재무부 소속의 재금수합위원(財金收合委員)으로도 활동하였다. 1919년 9월 11일 병을 얻어 상하이에서 사망하였다.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