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낙철(崔洛哲)은 1921년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무풍면 은산리에서 태어났다. 무풍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41년에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최낙철은 1941년 1월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임병찬(林炳讚) · 장세파(張世播) · 안진강(安津江) · 이태길(李泰吉) 등과 함께 항일 비밀결사 연구회(硏究會)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연구회에 참석한 학생들은 현재의 긴박한 세계정세를 볼 때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독립이 실현될 것이라는 데에 인식을 같이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조선의 독립에 대비하기 위해 각자가 가장 좋아하는 학문 분야를 연구하여 실력을 양성하고, 각 방면에서 조선의 최고 권위자가 되어 조선 독립을 위해 협력 매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학생들은 매월 학술 연구를 표방하며 모임을 갖고 동지들의 항일 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하급생 지도 및 동지들을 규합하는 방법에 관해 논의하며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연구회는 산하에 교육부 · 문학부 · 이과부 · 지리부 · 역사부 · 농업부 · 공업부 · 종교부 · 문예부 · 전기과학부 · 물리부 · 정치경제부 · 음악부 등을 두고 각 부서에 책임자를 두어 운영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최낙철은 지리부 책임을 담당하였다. 또한, 연구회에서는 1. 회원은 비밀을 엄수한다. 2. 회원은 매월 1일 각자 분담 부문의 연구 사항을 발표한다. 3. 각 부문의 책임자는 해당 부문의 하급생을 지도 교양하고 동지의 획득에 노력한다는 등의 운동 방침을 정하고 활동하였다.
최낙철은 1941년 4월 조선공립국민학교 훈도(訓導)로 임용되어 함경북도 나진(羅津)의 약초공립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도 연구회 사업을 이어 나갔다. 최낙철은 우수한 아동들을 대상으로 수재(秀才) 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을 위해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학생과 학부형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훈도로 활동하던 정현(鄭鉉)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내용의 수업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일제 경찰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정현의 집에서 학생들의 독서회 모임인 윤독회(輪讀會)에서 발간한 잡지 『반딧불』이 발각되면서 대전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일제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2년 동안 미결 상태로 있다가, 1944년 대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8 · 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1986년 경기도 파주에 있는 삼광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2005년 8월 6일 숙환으로 사망하였으며,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