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행 가사는 표기 체계상 국문이라는 점에서 한문 사행록과 다르고 문체상 운문이라는 점에서 국문 사행록과도 다르다. 국문으로 기록한 것은 수용 계층으로서 부녀자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한문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섬세한 상황들을 모두 담아 내고자 한 기록자로서의 욕구 때문이었다. 같은 국문 표기일지라도 사행 가사가 산문의 사행록과 다른 점은 실현화의 양상에 있었다. 즉 단순한 상황의 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사·교술 등 주제의 극대화를 통해 기록자의 의도를 전달하는 데 가사 장르 선택의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산문 기록보다는 덜 설명적이고 덜 구체적이지만, 산문 기록에서는 얻기 힘든 정서적 고양을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들은 가사 장르를 선택했으리라 본다. 이처럼 표현과 전달의 효율성을 바탕으로 한 장르 선택의 타당한 이유는 사행 가사에 노출된 관찰자의 시선이나 세계관과 함수 관계에 놓이는 내용이기도 하다.
지식인들이 해외 체험을 기록한 가사 작품의 경우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와 〈병인연행가(丙寅燕行歌)〉가 대표적이다. 당시 조·중 외교가 활성화되어 많은 교류가 있었고, 국문학사상 가사 시대가 이미 열려 있었던 만큼 실제로 알려진 것보다 많은 사행 가사들이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일동장유가〉는 일본 쪽 사행 가사이고, 〈병인연행가〉는 청나라 쪽 사행 가사다. 전자는 1763년(영조 39) 계미통신사의 삼방 서기로 따라갔던 김인겸의 작품이고, 후자는 1866년(고종 3) 왕비 책봉 주청 사행의 서장관으로 따라갔던 홍순학의 작품이다. 둘 사이에는 100년의 시차가 있을 뿐 아니라 지역 또한 현격하게 다르지만, 같은 잣대로 분석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사행록의 장르적 관습을 거부하고 국문의 가사를 선택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이다. 그들이 얻은 견문을 글의 내용으로 가공하는 데 장르의 선택은 중요한 변수였기 때문이다. 한문으로 하느냐 국문으로 하느냐는 1차적 선택의 문제였을 것이고, 산문으로 하느냐 가사로 하느냐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표기 수단으로 국문을 선택한 대부분의 기록자들은 산문을 선택했다.
그와 달리 가사를 선택한 소수의 기록자들은 사행 기록의 관습성을 탈피한 바탕 위에 특별한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다. 무엇보다 가사가 유리한 것은 쉽게 읽히므로 보다 많은 독자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의 연행록이 시장성을 노린 문필 행위는 아니었겠지만, 보다 많은 독자를 겨냥하는 것은 글 쓰는 이들의 당연한 노림수다. 기록자 자신의 가족을 포함하여 주변에 포진한 인물들을 1차적 독자로 상정할 때 국문, 그것도 가사라는 평이하면서도 내용의 초점화가 가능한 장르를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대부분의 가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신기한 체험을 가족들 앞에서 말하는 것처럼 써 나갔으리라 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행 가사에는 신기한 해외 체험과 함께 화이(華夷) 구분의 세계관이나 그로부터 형성된 시선이 전체의 서술을 이끌어 나가는 추동력으로 작용한다. 이처럼 서술 주체는 공적 임무를 띤 사절이나, 기록 자체는 개인적인 보고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이 작품들은 공적·사적인 성격을 공유한다.
연행사나 통신사들이 인식의 대상으로 삼고 있던 외부 세계는 중국이나 일본이 전부였고, 그들의 의식 또한 중화주의나 한문학적 우월주의가 전부였다. 명·청 교체 이후 크게 변한 동북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감안한다 해도 내면적으로 양국에 대한 조선의 인식이나 자세에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랑캐’ 청나라가 중화의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중원의 지배자로 등장하면서 존속되어 오던 화이 구분의 세계관은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으며,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일본으로부터 소중화적(小中華的) 자존 의식에 손상을 입은 조선으로서도 마찬가지로 세계관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세계관 변화의 단서가 사행 가사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