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신(韓維信, 1690?~1765)은 영조 때 달성(達成: 현재의 대구)에 살던 시조인(時調人:作家·唱者·時調譜 수집가)이다.
본서는 그가 김유기(金裕器, 생몰년 미상)로부터 원래의『영언선(永言選)』을 물려받은 다음 새로운 『영언선』을 만들었고, 한유신 자신 혹은 그의 사후 추종자들이 그것을 『박씨본해동가요(朴氏本海東歌謠)』‘유명씨’ 부분 말미에 첨부했으며, 기존 가집의 작품들과 중복되는 것들을 산삭(刪削)함으로써 현재와 같은『영언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김유기가 편찬한 본래의 『영언선』은 그가 대구에 내방한 을미년(숙종 41년, 1715) 이전부터 존재하던 독립된 가집이었다. 을미년부터 그 가집은 한유신 등에게 노래 교습용으로 사용되었고, 노래의 묘리를 깨친 후에도 한유신은 여러 사람들의 가보(歌譜)를 조사하며 찾아[搜探] 다녔다.
김유기 사후에 한유신은 스스로 노래를 짓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노래를 수집하기도 하면서,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집을 보완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만난 『청구영언』(진본)과 『해동가요』(원본)는 김유기가 편찬한 본래의 『영언선』을 한유신 자신의 새로운『영언선』으로 개수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미 학계에 발표된 『박씨본해동가요』의 앞부분에는 김수장의 「해동가요서」, 「화사자(花史子)서」, 음강씨(陰康氏)적 고사(故事)·진청(秦靑)과 한아(韓娥)의 고사·노인(魯人) 우흥(虞興)의 고사, 각조체격(各調體格), 초중대엽(初中大葉), 이중대엽(二中大葉), 북전(北殿), 이북전(二北殿), 초삭대엽(初數大葉), 이삭대엽(二數大葉) 등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한유신의 「영언선서」, 한유신의 작품 11수의 가곡이 나오며, 그 뒤에 무명씨(無名氏) 및 접소용삭대엽가합자초집(接騷聳數大葉可合者抄集), 낙시조(樂時調), 만횡(蔓橫), 장진주(將進酒) 등이 나온다.
한유신의 「영언선서」는 자신과 김유기의 관계를 중심으로 『영언선』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는 만큼 가장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자료다. 김치묵(金致黙)의 「제영언선후」, 김복현(金福鉉)의 「제영언선발」, 사벌산인(沙伐散人)의 「제영언선권후」, 이현(李賢)의 「제영언선후」, 박사후(朴師厚)의 「제영언선후」, 심상운(沈祥雲)의 「제영언선후」등이 『영언선』이나 한유신에 관한 사실들을 설명해 주는 글들이다.
『영언선』에는 한유신의 글을 포함하여 9편의 서·발문과 한유신의 작품 11수의 가곡이 실려 있다. 『영언선』의 편찬 경위나 한유신 자신의 노래와 노래생활에 대한 비평적 언급들이 담긴 서·발문들과 한유신의 작품들이 『영언선』 내용의 두 축인 셈이다.
한유신의 작품들에는 자연과 음악에 대한 애호의 정신을 바탕으로 산수간(山水間) 청유(淸遊), 한정(閑情), 인생무상(人生無常), 성대(聖代)에 대한 칭송, 인륜(人倫) 등이 주된 내용을 형성하고 있다.
본서에 관련된 기록들은 당대 가집 편찬의 한 관행을 알려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미 나온 가집을 저본으로 가감·정정하는 작업을 통하여 새로운 가집이나 원래 가집의 이본으로 갱신해나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영언선』과 결합함으로써 박씨본을 파생시킨 원본 『해동가요』가 가단에 존재했었을 것이며, 그 존재를 추적함으로써 『해동가요』의 계보를 완성시킴과 동시에 『영언선』의 본래 모습 또한 재구할 수 있다는 점은 본 가집 발견의 소득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