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가」는 19세기 거창의 수령 이재가(李在稼)와 아전들의 탐학을 고발한 저항적 현실 비판 가사이다. 「거창가」는 「한양가」와 「거창가」로 구성되어 있어, 전혀 다른 두 내용이 합철되어 있다. 「거창가」는 “서사: 도탄에 빠진 거창, 본사: 수령 이재가의 착취와 학정 묘사, 결사: 임금에게 호소”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에 묘사된 ‘거창의 비참한 현실’은 「거창부폐장 초」의 내용을 가사체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거창가」는 조선조 말기에 지방관의 학정을 비판하던 민중들의 저항 정신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가사 작품이다.
「거창가」는 「한양가」와 원 「거창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근 발굴된 조규익본과, 그 내용 중의 사실들을 입증하는 관련 문서들이 전혀 성격이 다른 책의 한 부분으로 조심스럽게 필사 · 합철되어 있음이 밝혀졌는데, 조규익본의 「한양가」 부분을 제외한 원 「거창가」 부분은 ‘299-310구’(서사), ‘311-754구’(본사), ‘755-776구’(결사)로 구성되어 있다.
이른 시기에 발굴되어 ‘정읍군 민란시 여항청요’로 명명된 김준영본의 “이제가 어느제며/저제가 어인젠고”를 학계에서는 최근까지 ‘이 때가 어느 때며/저 때가 어느 땐고’로 풀었다. 그러나 조규익본이 발굴 · 소개되면서 ‘이제가’는 거창부사 재임 시절 탐학을 자행한 핵심 인물 이재가의 와전 혹은 풍자적 어희(語戱)였음과, 그로 인해 김준영본은 원래 「거창가」의 ‘ 거창’을 ‘ 정읍’으로 바꾼 이본임이 함께 밝혀지기도 했다.
현재 남아 전해지는 「거창가」의 필사본들은 대부분 임술민란 이후 고종대∼1930년대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거창가」 내용 가운데 핵심 인물인 수령 이재가의 재임이 1837∼1841년임에도 그로부터 20여 년이나 지나서야 필사본들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점과, 「한양가」와 ‘원 「거창가」’가 결합되어 있는 점 등은 ‘원 「거창가」’가 불온 문서로 상당 기간 단속되어 오다가 임술민란을 계기로 지방관들의 학정에 대항하기 위한 대민(對民) 창의(倡義)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과정에서 「한양가」와 결합되었고, 임술민란 이후 약간 느슨해진 분위기를 틈타 각 지방에서 활발하게 전사(轉寫)되었음을 의미한다.
작품 뒷부분에 나오는 ‘거창의 비참한 현실’은 「거창부폐장 초」의 내용을 가사체로 바꾼 데 불과하다. 「거창부폐장 초」는 서두와 본체로 나뉘며, 서두에 제시된 폐단들을 조목조목 나열하여 설명한 본체는 6폐(六弊)[환폐(還弊) · 결환지폐(結還之弊) · 군정지폐(軍政之弊) · 방채지폐(放債之弊) · 창역조지폐(倉役租之弊) · 차일지폐(遮日之弊)], 3통(三痛)[남장지통(濫杖之痛) · 부녀원사지통(婦女寃死之痛) · 명분지문란(名分之紊亂)], 2원(二寃)[우정지폐(牛政之弊) · 면임원징지원(面任寃徵之寃)], 기타[향소쟁임의 변(鄕所爭任之變) · 염문(廉問) · 학궁지폐(學宮之弊)] 등이고, 〈거창가〉는 이 내용들을 순서에 맞게 정확한 가사체로 바꾸어 놓은 데 불과하다.
조선조 문물의 찬연함과 왕조 창업의 정당성 및 영속성을 찬양한 「한양가」를 앞쪽에 배치한 것은 거창의 비참함을 대비적으로 강조함으로써 「거창가」 창작 및 수용의 주체들이 현실에서 만나는 수령과 아전들의 착취와 학정을 비판하고 바로잡으려 했을 뿐, 임금을 정점으로 하던 중세적 통치 질서에 대한 반역의 의사가 없었음을 천명하려 했기 때문이다. 작품 구조상 서사에 그쳤어야 할 앞부분이 지나치게 장황하여 전체적으로 불균형을 이룬 것도 뒷부분 즉 ‘거창의 현실에 대한 고발’이 몰고 올 현실적 파장을 작자들 스스로 우려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거창가」는 기층 민중들이 중세적 지배질서의 해체가 이루어지던 조선조 말기에 지방관의 학정을 비판하며 저항 정신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가사 작품이다. 내용상 규탄의 표적은 개인으로서의 거창 수령 이재가와 탐학을 일삼는 아전들이었는데, 이재가가 이임하고 나서도 삼정(三政)의 문란은 여전하거나 오히려 더욱 심해지는 형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령이나 아전들도 바뀌긴 했겠으나 이재가를 규탄하는 노래가 여전히 힘을 발휘한 것은 이재가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탐관오리의 전형으로 치환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체제 혁명이 아닌 정상적 통치 질서의 확립에 대한 기층 민중들의 요구를 감안할 때, 임금에게 호소하고 기대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당장 살아갈 길이 막막해진 민중들의 입장에서는 우선 탐관오리를 제거하는 일이 급했기 때문이다.
민중 저항의 극치였던 동학 농민반란의 단계에 이르러서도 근본적인 체제 부정은 생각할 수 없었다. 동학 농민반란보다 30여 년 이상이나 앞서 일어난 임술민란 역시 그 목적은 탐관오리의 축출이나 잘못된 제도의 개선에 국한되어 있었다. 「거창가」와 함께 발견된 「거창부폐장 초」 · 「취옹정기」 · 「사곡서」 등이 임술민란 훨씬 전인 이재가 재임 당시 혹은 이임 직후 만들어진 것들로 본다면, 이것들을 근거로 하여 만들어진 「거창가」는 향후 임술민란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의 봉기에 불쏘시개 역할을 함으로써 한국문학사상 저항 가사의 대표작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