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의 「문선왕 악장」은 모두 7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14장의 『송사(宋史)』 「석전악장」, 8장의 『대성악보(大成樂譜)』 「석전악장」, 6장의 『명사(明史)』 「석전악장」, 16장의 『명집례(明集禮)』 「석전악장」 등과도 다른 점이다. 형태적으로는 『시경』의 4언체 악장을 수용한 중국 왕조들의 악장과 같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문선왕’은 당나라 현종이 붙여 준 공자의 시호이며, 문선왕 석전제는 중국의 역대 왕조들과 우리나라의 여러 왕조들 가운데 특히 조선조에서 통치 이념의 정당성을 바탕으로 왕조 영속의 당위성을 고취하고자 행하던 제례였다. 유교를 국시로 표방한 만큼 조선조에서 공자가 ‘백대 제왕의 스승’으로 추앙된 것은 자연스러웠으며, 그에 따라 이념의 정통성을 확립한다는 측면에서 문선왕 석전제의 제도가 수시로 보완·시행되어 왔다. 그 석전에서 불리던 「문선왕 악장」은 국가 대사(大祀)였던 종묘나 문소전(文昭殿) 제례악장과 함께 조선조 국가제사의 한 축으로 정립되어 있었다. 현재 조선의 「문선왕 악장」에서 ‘영신(迎神)·아헌(亞獻)·종헌(終獻)·송신(送神)’ 등의 악장이 빠져 있는 것은, 원래 조선조 아악의 헌가(軒架)에는 악장이 없었던 제도적 이유 때문이다. 그 때문에 송나라와 원나라 『대성악보』의 「석전악장」에 있는 영신과 송신, 아헌과 종헌의 악장이 세종과 성종 대의 「문선왕 악장」에는 없는 것이다.
조선조 「문선왕 악장」의 내용들을 들면, ‘① 〈전폐 악장〉(성인들 가운데 탁월하신 문선왕께 제사 올리며 흠향을 기원), ② 〈초헌 공자 악장〉(하늘이 내신 문선왕께 많은 제수로 제사를 올리니 밝히 강림하여 흠향하시길 기원), ③ 〈초헌 연국공 악장〉(안빈낙도하신 안자께 제사를 올리니 신령께서 내림하여 흠향하시길 기원), ④ 〈초헌 성국공 악장〉(충서를 전하고 대학을 지어 상도를 가르치시며 후인들을 이끌어 주시는 성국공에게 제사 지냄이 마땅함), ⑤ 〈초헌 기국공 악장〉(문선왕의 적통으로 종사가 되고, 중용을 지은 기국공이 영원히 숭앙받을 것임), ⑥ 〈초헌 추국공 악장〉(문선왕의 도를 후세에 전한 공으로 만년 동안 아름다움 이어받으실 것임을 찬양함), ⑦ 〈철변두 악장〉(변과 두에 제수를 담아 제향을 드리니 예악이 조화하고 사람과 신령이 화열함)’ 등인데, 〈전폐 악장〉은 전체의 서사에 해당하고 초헌인 ‘정위(공자), 연국공(안자), 성국공(증자), 기국공(자사), 추국공(맹자)’ 등은 본사에 해당하며, 〈철변두 악장〉은 결사에 해당한다.
조선조가 개국되자마자 문선왕의 석전제는 고금에 통행된 국가의 상전(常典)이므로 월령(月令)의 규식(規式)에 맞춰 거행해야 한다는 논의에 따라 시행을 결정했고, 1398년(태조 7)에 발표한 즉위 교서(敎書)의 두 번째 항목에서 “문선왕은 백대 제왕의 스승이니 석채(釋菜)의 제례를 마땅히 정결하게 하고 혹시라도 삼감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하는 등 종묘·사직에 이어 문선왕 제례를 국가의 중요한 의식으로 공식화했다. 『악학궤범』(제2권)에 실려 있는 「문선왕」은 『세종실록』(제147권)의 「문선왕 석전악장」과 같은데, 세종 대 제례아악 정비 당시 정착된 악장이 성종 조의 『악학궤범』에도 변동 없이 올랐고, 현재까지 큰 수정 없이 지속되고 있다.
제사 대상인 문선왕을 돈호하고 그의 공덕을 나열·찬양하며, 제사 절차를 제시하면서 강림하여 제수를 흠향하실 것을 기원하는 내용의 기원은 『시경』 「노송」(〈반수〉 4장)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문선왕 악장〉이야말로 악장으로서의 『시경』 시를 정신적으로 이어받은 구체적 사례이며, 특히 고려와 조선의 태묘나 종묘 등 국가적 제례악장의 표본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구현한 모범적 선례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