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묘악장 ()

고전시가
작품
고려조 역대 왕의 위패를 모신 태묘의 제례에서 사용된 한시 형태의 노랫말.
정의
고려조 역대 왕의 위패를 모신 태묘의 제례에서 사용된 한시 형태의 노랫말.
구성 및 형식

『고려사(高麗史)』 「예지(禮志)」 길례조(吉禮條)의 국가제사들 가운데 태묘는 원구(圜丘)·방택(方澤)·사직(社稷)·별묘(別廟)·경령전(景靈殿)·제능(諸陵)과 함께 대사(大祀)에 속한다. 송나라로부터 대성악이 도입되면서 예종 대의 「9실등가악장(九室登歌樂章)」은 각 실마다 정성(正聲)과 중성(中聲) 2장으로 구성되었으나 의종 대부터 그 구분이 사라져 단장(單章) 형식으로 정착되었고, 예종 대의 태묘 악장인 〈9실등가악장〉은 초헌의 9실, 각 실 2장(정성·중성), 각 장 4언 8구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실마다 다른 음악 곡으로 반주되었다. 즉 ‘제1실 태조(太祖)-태정지곡(太定之曲), 제2실 혜종(惠宗)-소성지곡(紹聖之曲), 제3실 현종(顯宗)-흥경지곡(興慶之曲), 제4실 덕종(德宗)-엄안지곡(嚴安之曲), 제5실 정종(靖宗)-원화지곡(元和之曲), 제6실 문종(文宗)-대명지곡(大明之曲), 제7실 순종(順宗)-익선지곡(翼善之曲), 제8실 선종(宣宗)-청녕지곡(淸寧之曲), 제9실 숙종(肅宗)-중광지곡(重光之曲)’ 등이 그것들이었다. 1371년(공민왕 20) 10월의 제례절차에 의하면, 초헌의 각 실은 ‘1실(제1대 태조), 2실(제2대 혜종), 3실(제8대 현종), 4실(제24대 원종), 5실(제25대 충렬왕), 6실(제26대 충선왕), 7실(제27대 충숙왕)’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가운데 원종(4실)은 공민왕의 고조, 충렬왕(5실)은 공민왕의 증조, 충선왕(6실)은 공민왕의 조부, 7실(충숙왕)은 공민왕의 부친이다. 말하자면 불천지주(不遷之主) 삼위(三位)를 제외한 나머지 4위는 공민왕 자신으로부터 5대조로 채운 것이다.

내용

예종 대에 제작된 「9실등가악장」과 공민왕대에 두 차례에 걸쳐 제작된 악장은 현재 『고려사』「악지」에 정확히 남아 있다. 편의상 공민왕대에 두 번째로 지은 각 실 악장의 내용만을 이곳에서 살펴보고자 하는데, 연주된 각 실의 악곡명이 누락되어 있는 점은 특이하다. 각 실 악장 7편을 포함한 전체 16편 악장들의 제목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왕이 태묘의 문에 들어갈 때의 악장〉(아름다운 태묘에서 경건하게 제사를 올리니 복을 받을 것임), (2) 〈왕이 세수하는 곳으로 나갈 때의 악장〉(맑고 단 샘물에 깨끗이 세수하고 위의를 갖추어 제사 자리에 나아감), (3) 〈왕이 신전에 오르내릴 때의 악장〉(빛나는 태묘에서 찬란한 위의와 정결한 제수로 제사 드리며 만수무강을 빎), (4) 〈왕이 소차(小次)에 출입할 때의 악장〉(소차에 있거나 출입하는 모든 절차에 위의를 갖추고 제수와 음악으로 제사 드리며 경사를 간구), (5) 〈영신 악장〉(완벽하게 준비된 깨끗한 제사를 편안히 받아 주실 것을 신명께 간구), (6) 〈전폐 악장〉(끝없는 효성과 좋은 폐백으로 드리는 제사에 감응하여 경사를 내려 주실 것을 간구), (7) 〈봉조(奉俎) 악장〉(증손이 효심으로 드리는 풍성한 제사를 신명께서 흠향하시고 무궁한 혜택을 주실 것을 간구), (8) 〈제 일실(一室) 악장〉(천명을 받아 동방에 나라 세우신 태조의 신령께 복록을 내려 주실 것을 간구), (9) 〈제 이실(二室) 악장〉(부왕을 도와 공 세우신 무왕께 복록을 내려 주실 것을 간구), (10) 〈제 삼실(三室) 악장〉(문무 겸비하여 혁혁한 공덕 이루신 증조부께 앞으로 영원히 자손들을 보호해 주실 것을 간구), (11) 〈제 사실(四室) 악장〉(빛나고 위대하신 할아버지께 정성껏 제사 드리며 복을 내려 주시길 간구), (12) 〈제 오실(五室) 악장〉(온갖 복록 누리신 위대한 부왕을 추모하는 마음이 끝없고 영원함), (13) 〈제 육실(六室) 악장〉(근면한 우리 대왕의 공덕이 혁혁하여 큰 복록을 이루셨음), (14) 〈제 칠실(七室) 악장〉 (공덕 찬란하신 황고께서 자손들에게 영원히 복록을 내려주실 것임), (15) 〈음복(飮福) 악장〉(장엄한 의식의 태묘제사를 신명이 흠향하셨으니 자손들에게 영원히 경사가 있을 것임), (16) 〈문무가 물러가고 무무가 들어올 때의 악장〉(후손을 보호하신 혁혁한 조상들께 모든 것을 갖추어 제사하니 모든 절차가 훌륭함) 등이다.

의의와 평가

고려의 태묘 악장은 예종 대의 「9실등가악장」 제작 이후 의종 대의 신찬(新撰)과 공민왕 대 1·2차 신찬의 과정을 거쳐 정착되었다. 1116년(예종 11) 10월 태묘에서 대성아악으로 만든 태묘악을 연주했으며, 원구(圜丘)·사직(社稷)·선농(先農)·선잠(先蠶)·문선왕묘(文宣王廟) 등의 제례에도 사용했다. 의종(1146∼1170) 대에 이르러 악장에서 정성과 중성의 구분이 사라졌고, 1363년(공민왕 12) 5월에 9실(室) 신주를 태묘로 모시면서 다시 악장을 지었으며, 1371년(공민왕 20) 10월 왕이 친히 태묘에 제향을 올리고 두 번째로 악장을 고쳐 지었다. 그 과정을 거쳐 확립된 것이 고려의 태묘악과 악장이고, 우리 역사상 왕조의 최고 핵심 제례인 종묘제례와 악장이 구체적인 기록으로 나타난 첫 사례일 뿐 아니라 조선조 종묘악장의 선례로 참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조선조 악장 연구』(조규익, 새문사, 2014)
「고려 공민왕대 태묘 악장의 개찬 양상과 그 의미」(김명준, 『한국시가문화연구』 33, 한국시가문화학회, 2014)
「고려 국가제사의 체제와 그 특징」(김철웅, 『한국사연구』 118, 한국사연구회, 2002)
집필자
조규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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