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의공주혼전대향악장」은 〈초헌악장〉·〈아헌악장〉·〈삼헌악장〉·〈사헌악장〉·〈오헌악장〉·〈종헌악장〉 등 6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악장은 짝수 구로 되어 있는 기존의 악장 형태와 달리 4언 9구의 홀수 구 시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휘의공주’나 ‘노국대장공주’ 등은 공주 사후 추증된 시호 ‘인덕공명자예선안휘의노국대장공주(仁德恭明慈睿宣安徽懿魯國大長公主)’에서 나온 동일인의 이칭들이다. 노국대장공주와의 만남,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우여곡절, 왕위에 오른 뒤 원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지향하며 개혁을 실천해 온 공민왕의 행적과 고려의 혼란했던 내정 등 복잡한 역사적 사건들이 이 악장의 배경을 형성하고 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결합은 자신들의 황족으로 배필을 삼아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고자 했던 원나라의 정책에 따라 원하지 않는 짝을 받아 온 기왕의 사례들과 달랐다. 결혼 후 공민왕과의 사적인 관계나 노국공주가 고려 왕실에서 보여 준 공적 위상 또한 기존의 사례들과 분명 달랐다. 노국공주의 죽음이 공민왕의 파멸이자 고려 왕조의 멸망이라 할 만큼 공민왕에게 노국공주는 절대적 존재였다.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사망 이후 국력을 기울여 영전(影殿) 건립의 대역사(大役事)를 벌임으로써 민심을 잃었고, 결국 고려는 망하게 된 것이다.
1363년(공민왕 12) 5월에 9실의 신주를 다시 태묘로 모시면서 「9실등가악장」을 지었고, 1367년(공민왕 16) 정월에 「휘의공주혼전대향악장」을 지었으며, 1371년 10월에 「태묘악장」을 지음으로써 고려조의 국가제례를 위한 아악악장은 완성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휘의공주혼전대향악장」은 「9실등가악장」과 「태묘악장」 사이의 정확히 중간에 위치하는데, 「9실등가악장」이 「태묘악장」으로 귀결되게 한 실험적 표본이 바로 「휘의공주혼전대향악장」이었다.
전체 악장은 ‘휘의공주 혈통의 위대함-덕망에 대한 찬양-복록의 기원’(〈초헌악장〉), ‘휘의공주의 엄숙한 덕에 대한 찬양-임금을 지극히 따른 덕망에 대한 찬양-제사 절차의 완정함에 대한 찬양’(〈아헌악장〉), ‘휘의공주 덕의 훌륭함-공주에 대한 제사 절차의 완정함-신의 흠향 및 신령의 보살핌에 대한 기원’(〈삼헌악장〉), ‘휘의공주 덕의 훌륭함-제사 절차의 완정함과 흠향의 기원-제사음악의 완벽함에 대한 찬양’(〈사헌악장〉), ‘제사음악의 훌륭함-제사의 흠향과 강복의 기원-예의와 법도의 완정함에 대한 찬양’(〈오헌악장〉), ‘제사의례의 융성함과 엄숙함-제사 진행의 공손함과 경건함-신령의 흡족한 흠향에 대한 기원’(〈종헌악장〉) 등 6장의 구성을 보여 줌으로써 초헌만으로 종결되던 기존의 태묘악장들에 비해 대상을 훨씬 더 예우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휘의공주혼전대향악장」에 상정된 대내 정치적 의도와 원나라와의 외교적 의도가 함께 반영되어 있음은 이런 점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휘의공주혼전대향악장」은 우리 왕조 역사상 역대 왕이 아닌 개인 추모의 독립 악장으로는 첫 사례이자 향후 그런 악장 제작의 방법이나 관행의 한 단서를 결정적으로 보여 준 모범적 선례였다. 「태묘악장」이나 「휘의공주혼전대향악장」의 등장은 대성악 수용 이후 아악의 정착 및 발전과 궤를 함께 해온 일이면서, 조선조 아악악장의 기틀을 마련한 문화사적 의의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