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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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유적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혜통이 창건한 사찰.
이칭
이칭
유석암(留石庵)
목차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혜통이 창건한 사찰.
내용

풍기의 소백산(小白山)에 있는 절로, 일제강점기에는김룡사(金龍寺)의 말사였다. 한 때 유석암(留石庵)으로 부르기도 했다. 유석사의 연혁은 권상로(權相老)가 쓴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 책은 「김룡사본말사지(金龍寺本末寺誌)」·「유석암기(留石庵記)」·「유석사유지(留石寺遺誌)」 등을 인용하여 유석사의 연혁을 서술하였다. 이에 의하면 유석사는 694년(효소왕 3) 혜통(慧通)이 창건하였고, 고려 말 두 차례의 중창을 거쳤다. 1368년(공민왕 17) 나옹혜근(懶翁惠勤)이 학가산(鶴駕山) 보문사(普門寺)에 주석하던 중 잠시 이 절에 옮겨와 주석했는데, 그때 왕이 친히 곡식 3,000석을 하사하여 절을 중창하였다. 그러나 1년도 채 되지 못해 사찰 건물이 전소되었다. 이에 추동(錐洞) 비로사(毘盧寺)에 있던 태고보우(太古普愚)가 제자 구곡(龜谷)을 보내 중수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구곡이 이 절을 중수한 시기는 1387년(우왕 13)으로 태고보우가 입적한 뒤이며, 구곡은 보우의 제자가 아닌 혜근의 제자이다. 구곡이 보우의 제자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권상로가 참고한 「김룡사본말사지」 및 「유석사유지」는 모두 조선 후기의 관점에서 기술된 연혁임을 알 수 있다. 구곡의 중수 이후 조선 후기까지의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1876년(고종 13) 불에 탄 절을 낙암(樂庵)과 계홍(戒洪)이 중건하였고, 1928년과 1976년의 중창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절에는 석조관음보살좌상 및 철조아미타불좌상, 석조석가불좌상 2구 등 여러 점의 문화재가 있었으나 1972년에 도난당하였다.

참고문헌

『한국불교사찰사전』(이정, 불교시대사, 1996)
『한국사찰전서』(권상로, 동국대 출판부, 1979)
『동아일보』(1972.3.13)
집필자
강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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