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시대 창건되어 1860년대 폐사되었으며 사원의 규모가 크고 승려의 수가 수천 명이나 되어 만세암(萬世庵)의 쌀 씻은 물이 10리까지 흘러갔다고 한다. 또한, 평양감사를 지낸 바 있는 풍천(豊川) 임씨(任氏)의 무덤이 만세암 뒤로 모셔진 후 사원이 폐사되었다고도 한다. 한편 조선 후기의 문인인 오숙(吳䎘, 1592~1634)은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에 머물면서 「만수암에서 시축의 운에 차운하여 혜희선자에게 주다(萬壽庵 次詩軸韻 贈惠煕禪子)」란 시를 지었는데, 이 시기 만세암을 직접 방문했을 가능성이 크다.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묘막리 만수동에 있었던 암자로 만수암(萬壽庵)이라고도 한다. 묘막리 마을 전체가 만세암 터였다고 전한다. 현재는 모두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어 절의 구역을 정확히 알 수 없고, 건물의 규모를 추정할 만한 주초석 등도 확인되지 않는다. 주위에서 깨어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고 있으며, 다완과 청화백자·분청사기 조각 등이 농경지 곳곳에서 수습되고 있다. 또한, ‘山口’명 백자가 출토되었는데 일제강점기까지 사원이나 거주지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