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점사본말사지(楡岾寺本末寺誌)』에 의하면, 안양사(安養寺)는 863년(경문왕 3) 사굴산문(闍崛山門)의 개창조인 범일(梵日) 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창건 당시 극락삼성(極樂三聖 : 아미타삼존불)은 나무로, 관세음보살 2위(二位)는 돌로 만들어 봉안했기 때문에 안양사라고 이름 지었다. 조선시대인 1398년(태조 7)에 무학(無學)이 안양사를 다시 세웠고, 1621년(광해군 13)에 이름(頤凜)대사가 금강산에서 이곳으로 와서 옛터에 건물을 짓고 대승암(大乘庵)이라 하였다. 1884년(고종 21) 성월(性月)화상이 사원 전체를 수리하였으며, 1890년(고종 27)에는 진각(眞覺)대사가 안양사의 산신각(山神閣)을 개축하기 시작해 6년 후인 1896년에 완성하였다. 1904년에는 강백(講伯 : 경론을 가르치는 강사의 존칭) 진용성(陳蓉城)이 화주(化主)가 되어 법당 6칸을 중건하였고, 다음 해에는 요사를 다시 건축하는 동시에 후불 탱화와 신중 탱화를 새롭게 조성하였다. 1912년에는 월운선사가 중국 상해로부터 종 2구를 조성해 와서 안양사와 복혜암(福慧庵) 에 두었다. 1940년대 촬영된 사진 자료에 사찰 건물 여러 채가 확인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 안양사가 존재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이후 6·25전쟁 때 모두 불타버렸다고 한다.
『유점사본말사지』에 수록된 「강원도철원군보개산안양사중건기(江原道鐵原郡寶盖山安養寺重建記)」에 의하면 허응대로(虛應大老)와 함월고추(涵月古推) 등이 이 사찰에 머물렀다고 한다. 한편 안양사 주위에는 4개의 암자 터가 있었다고 하는데, 수월암(水月庵), 복희암(伏喜庵), 복혜암 등의 이름이 확인된다. 그 중 복혜암은 936년(태조 19)에 통진(洞眞 : 道詵의 제자인 慶甫)대사가 창건하고 석상으로 아미타불을 봉안하였다고도 한다. 조선 말기인 1874(고종 11) 단월인 신씨(申氏)가 1,360평의 땅을 복혜암에 시주하였으며 1892년(고종 29)에는 성월대사가 복혜암을 중건하였다. 3년 후인 1895년에 월운(月運)선사가 복혜암의 탱화를 새롭게 조성하였다. 1897년에는 상궁(尙宮) 임씨(任氏)가 복혜암에 삼성각(三聖閣)을 건축하였다. 1927년에 화주 진용성이 복혜암을 중건하였다. 현재 안양사는 율이리의 민통선 이북 지역에 있는데, 동송읍사무소로 가는 도로 끝 지점의 유격장 왼쪽으로 400∼500m 쯤 들어가면 오른쪽에 절터가 나온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절터에서 50m 아래쪽에 현무암으로 만든 물통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군 전술도로 개설로 절터가 많이 파괴되었지만, 아직도 조선시대 기와와 도자기 조각들이 수습되고 있으며 건물 축대와 석축 계단 등이 남아있는 건물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