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때 신효거사(信孝居士)가 출가한 후 자신의 집을 희사하여 사원으로 삼고 효가원(孝家院)이라 하였다. 신효거사는 공주(公州) 사람인데, 어머니를 효도로 봉양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가 고기가 아니면 식사를 하지 않자 고기를 구하고자 산과 들을 돌아다니다가 다섯 마리의 학을 보고 활을 쏘았는데, 깃털 한 개만을 얻었다. 그 후 신효가 그 깃털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니 모두 동물로 보여 결국 고기를 구하지 못하고 자신의 넓적다리를 잘라 어머니에게 드렸다. 이후에 출가하여 자신의 집을 절로 삼았는데, 그것이 효가원이다. 신효의 효성 때문인지 그를 유동보살(幼童菩薩)의 화신으로 여기기도 한다. 한편 신효는 관음보살의 가르침을 받아 현재의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月精寺)로 옮겨 주석하였다. 그곳에서 신효가 가지고 있던 학의 깃털을 찾으러 온 5명의 비구(比丘)를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오대산 오류성중(五類聖衆)의 화신이었다고 한다. 월정사를 창건한 이는 자장(慈藏)이고 그 다음에 주석한 이가 신효, 다음이 신라 하대 사굴산문(闍崛山門)의 개산조인 범일(梵日)이라고 하니 이를 통해 신효의 활동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13세기 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삼국유사』에서 “지금의 효가원이다(今爲孝家院)”라는 찬술자의 문장을 확인할 수 있고, 14세기 문인인 정추(鄭樞, 1333~1382)의 「공주효가원(公州孝家院)」과 「공주도중(公州道中)」이라는 시에서 효가원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을 통해 볼 때 고려시대에도 이 사찰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에서는 “공주에서 동쪽 10리에 효가리원(孝家里院)이 있다 ”고 기록하고 있어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효가원이 역원(驛院)으로 변경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