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흥사(天興寺)는 신라 때 창건되어 고려시대까지 유지되다가 조선 전기에 폐사된 사찰이다. 고려시대에는 유가종(瑜伽宗) 소속 사원이었는데 조선 초기에는 조계종에 속해 있었다. 현재 천흥 저수지의 조성으로 인해 사역(寺域)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성거산 동북 사면 하단부에 최근 건립된 불당이 있다. 원래의 절터는 불당의 전면에 있는 과수원 지역으로 추정된다. 절터에는 각종 석부재를 비롯하여 기와·자기·토기 조각 등이 산재해 있고 ‘천흥(天興)’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 조각도 발견된 바 있다.
천흥사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전하지 않지만, 당나라 때 세운 구리 기둥이 있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통해 볼 때, 대략 신라 통일기를 전후한 시기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천흥사의 유물인 금동관음보살입상과 천흥사명동종(天興寺銘銅鐘)에는 '통화(統和)'라는 연호가 새겨있어 11세기 초에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시기 사찰에서 여러 불사가 이루어졌음을 살필 수 있다. 1137년(인종 15)에는 유가종의 승려 관오(觀奧)가 천흥사에 주석하였다. 조선시대인 1407년(태종 7) 12월 의정부(議政府)가 명찰(名刹)로 여러 고을의 자복사(資福寺)를 대신할 것을 청하였는데, 여기에 천흥사가 언급된 바 있다. 그러나 성종 때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이미 폐사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천흥사가 조선 초까지는 존재하다가 16세기 이전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종휘(李種徽, 1731~1797)가 쓴 「동장기(銅檣記)」에도 천흥사가 언급되는데, 특히 구리 기둥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는 천흥사가 폐사된 후에도 구리 기둥이 오랫동안 남아있었고 그에 관한 이야기가 조선 후기에까지 전승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천흥사의 유물로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오층석탑이 있는데, 신라 석탑의 조형미를 계승한 고려시대 석탑이다. 1966년 해체 수리 때 옥개석이 발견되었다. 약 5.5m의 높이에 이중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린 형태이고 1층 탑신에는 사리 봉안 장치가 있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원래 위치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이며 60cm 간격을 두고 동서로 세워져 있다. 원래는 2층 기단 위에 당간과 지주를 받치고 있었으나 기단은 파괴되고 간대석(竿臺石)도 흩어진 상태이다. 기단의 전후와 측면에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는데 그 수법이 정교하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금산사(金山寺) 당간지주나 갑사(甲寺) 철당간지주의 기단부 양식과 유사해 보이지만, 시간이 흐른 뒤의 퇴화된 양식으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1993년 국보로 지정된 천흥사명 동종은 국내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 종 중에서 가장 크다. 연곽 아래에 위패형 틀을 설치하고 명문을 새겼는데, ‘성거산천흥사종명통화이십팔년경술이월일(聖居山天興寺鐘銘統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이라 기록되어 있어 1010년(현종 1)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