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암(開聖庵)은 개성사(開聖寺)라고도 불렸다. 절의 창건에 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다. 고려 공민왕 때(1351~1374)의 문신인 정지상(鄭之祥)이 지은 ‘개성사 팔척방시(開聖寺 八尺房詩)’가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다. 이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 보에 아홉 번씩이나 굽이진 길 가파른 메를 올라오니 우뚝 반공에 솟은 집이 두어 칸 맑디맑은 샘에서는 찬물이 떨어지고 해묵은 어두운 벽엔 푸른 이끼 아롱져라 바위 끝 솔은 한 조각달에 늙어 있고 하늘 가 구름은 천점 산에 낮았네! 여기는 홍진 만사 이르지 못하나니 그윽한 사람 한 평생 한가히 삶을 보내는 곳(百步九折登㠝岏 家在半空唯數閒 靈泉澄淸寒水落 古壁暗淡蒼苔斑 石頭松老一片月 天末雲低千點山 紅塵萬事不可到 幽人獨得長年閑).” 시의 내용을 통해 보았을 때 개성사는 성거산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산내 암자였음을 알 수 있다. 개성사는 1868년(고종 5)에 모든 건물이 불에 타서 이듬해 일허(一虛)가 중건하였다. 1907년 김경봉(金敬峰)이 화주가 되어 나한전을 중건했으며, 1932년에는 주지 백구명(白具明)이 요사를 중건하였다. 일제강점기의 31본산시대에는 전등사(傳燈寺)의 말사인 운흥사(雲興寺)의 산내 암자였다. 개성사의 현재 상황은 알 수 없으나 북한 측 자료에 의하면 현존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