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암(普賢庵)은 금강산의 울연(鬱然) 위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 전기의 문인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를 참고하면 “장안사(長安寺)에서 냇가를 따라 올라가면 울연과 보현암을 지나 신림사(新林寺)에 이른다”고 하였다. 고려 후기의 문인 이곡(李穀)이 지은 「금강산보현암법회기(金剛山普賢菴法會記)」가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원나라 조정의 규장공(奎章公)이 태정(泰定) 연간에 일이 있어서 고려에 와서 풍악산(楓嶽山)을 유람하던 중 보현암을 방문하였다. 때마침 주지 지견(智堅)이 절을 중수하고 있었는데, 공이 그 풍경의 절묘함을 좋아하여 지견에게 중수 공사의 단월(檀越: 시주자)이 되겠다고 약속하고는 돌아갔다. 10년 후에 보현암의 승려 달정(達正)이 규장공을 찾아가니 공은 기뻐하면서 저폐(楮幣) 5천 냥을 흔쾌히 시주하였다. 절로 돌아온 달정은 이 돈으로 불사를 크게 일으키고 이듬해에는 선열회(禪悅會)를 개최하였다고 한다. 보현암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까지도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