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순(玄己順, 1919~2014)의 본관은 연주(延州)이고, 서울 종로구 청진동 71번지에서 9남매의 둘째로 출생하였다. 1936년에 경성여자고보(현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여자사범학교 강습과에 진학하여 1937년에 졸업하고 충청북도 무기공립보통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고 이후 서울 재동국민학교로 전근하였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가정학과로 편입하였으나 재학 중에 미국으로 유학하여 오하이오주의 웨슬리언(Ohio Wesleyan) 대학을 졸업한 다음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가정학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978년에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에서 인간문화학으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43세의 나이에 결혼하였으며, 94세에 별세하였다.
현기순은 귀국 후 1953년부터 1978년까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과 가정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가정대학장을 역임하였다. 한국 최초로 5가지 기초 식품군을 도입하고, 계량스푼과 계량컵을 보급하는 등 영양학에 바탕을 둔 식생활 개선을 도모하기 위한 전국적인 운동을 전개하였다. 미국에서 영양사 자격증을 받고 인턴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현기순은 병원 급식의 기본틀을 만들었으며, 월남에 파병된 군인들의 먹거리를 위해 김치 통조림 등 한국 음식의 통조림화 작업을 하였다. 영양사와 조리사를 양성하기 위한 체계적인 교육을 하는 등 단체급식의 필요성과 함께 효율적인 급식체제를 마련하기 위한 연구를 하였다.
또한 1947년에 창립되었으나 해체된 대한가정학회를 재조직하였고, 1978년에는 제10대 국회의원이 되어 농수산분과위원회에서 식량 관련 정책 등 다양한 의정활동을 하였다. 1967년부터 1980년까지는 여성저축생활중앙회장을 지내며 가계부 적기 운동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여성 의식 개혁운동을 펼쳤다. 이외에 대한가정학회 회장, 서울시 교육의원, 국민당 중앙위원회 부의장, 새마을부녀회 고문, 대한영양사협회 고문 등의 사회활동을 하였으며, 1982년 청소년복지회관 운영위원과 국제 존타 서울클럽 회장을 역임하면서 여성의 평등권 및 여성과 아동학대 예방에 관련한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였다.
중 · 고등학교의 가정교과서를 집필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리학』, 『식생활관리학』, 『단체급식관리』 등의 대학 교재를 집필하였다. 영양학, 단체급식, 식생활 실태, 가정 경제 관리와 관련된 다수의 논문이 있다.
가계부 쓰기 운동과 여성 저축 운동 등의 성과를 인정받아 1971년에 대통령 국민포장을 받았고, 1975년 서울대학교와 웨슬리안대학교의 가정학 교류에 일익을 담당한 공로로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에서 특별 공로상을 받았으며, 1977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