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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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달의 운행에 따라 1년 12개월의 날짜와 24절기 등을 적어 놓은 책 형태의 달력.
이칭
이칭
역서(曆書)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책력(冊曆)은 전통시대 달력이 책의 형태로 만들어져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종류의 책력이 만들어졌다. 가장 대중적이고도 대량으로 만들어진 『시헌서(時憲書)』를 비롯하여 왕실과 고위 관리들이 사용한 『내용삼서(內用三書)』, 『천세력(千歲曆)』과 『백중력(百中曆)』과 같이 100여 년 단위의 장기적인 역서, 그리고 『칠정력(七政曆)』과 같은 천체력 등이 있었다.

목차
정의
해와 달의 운행에 따라 1년 12개월의 날짜와 24절기 등을 적어 놓은 책 형태의 달력.
내용

역법(曆法)은 시간을 구분해 주고 날짜가 시작되어 끝나는 순서를 매겨나가는 법이다. 그 구분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시대와 나라마다 달랐다. 가장 기본적인 시간 단위는 태양이나 달 등 천체의 주기적 현상이 기본이 되었다. 우리나라 전통 달력인 책력(冊曆)은 이 같은 자연 현상으로 생활에 필요한 단위나 주기를 정하고 이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천체 현상에서 지구가 자전하여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1년의 주기와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 달의 주기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고대 사람들은 끊임없이 역법을 개선하여 달력을 천체 주기에 맞추려 했다.

고대 동양사회에서 달력 만드는 일은 중앙 정부에서 담당하였다. 정부에서 천문학자를 고용하여 달력을 만들고 그것을 백성이 사용한 것이다. 서로 다른 달력을 사용하면 사회 질서가 유지되기 힘들기 때문에 중앙 정부는 통일된 하나의 달력을 사용하도록 했고, 이것이 잘 유지되도록 하는 일이 곧 중앙 정부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었다. 중국이나 한국의 역대 왕조는 항상 정확한 달력을 만드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일식이나 월식과 같은 천문 현상을 하늘이 지상의 인간에게 계시하는 일이라 믿었던 고대 동양사회에서는 일식을 예고했다가 일식이 일어나지 않을 경우, 천문 관리는 곤욕을 치렀다. 게다가 백성들도 달력에 표기되어 있는 15일에 막상 보름달이 뜨지 않으면 달력을 만든 정부를 의심하여 정부의 권위가 추락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정부는 가능한 정확한 달력을 만들려고 했다.

전통사회에서 달력은 하늘의 시간을 백성들에게 알려 주었고, 백성들은 그것을 실제 생활에서 사용하였다. 또한 달력을 만드는 것은 정치하는 사람의 몫이었다. 시간이란 현대인에게는 사회 구성원 간의 약속이지만, 전통사회에서는 자연의 운행에서 얻어지는 것으로서의 의미가 더 컸다.

오늘날 달력이라고 하면, 대체로 1년 12개월의 날짜와 요일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전통시대 책력은 천체의 움직임을 정확히 관측하여 하늘을 공경하는 뜻을 보이고, 이를 다시 달력으로 편찬하여 백성들에게 반포하는 것이 왕정의 임무라는 전통적인 수명개제(受命改制)의 천문사상이 담겨 있었다. 이는 농업 국가의 전통적인 역법의 기능, 다시 말해 적기에 농사일을 할 수 있도록 정확한 달력을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일이 정치의 기본 전제가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책력이라는 명칭 외에도 역서(曆書), 일과(日課) 등의 명칭이 사용되었는데, 이 가운데 책력과 역서가 통칭적으로 사용되었다. 책력은 책의 형태를 띤 역을 지칭할 때(『태종실록』 17년 12월 20일), 일과는 역일(曆日) 아래에 역주(曆註)가 있어 날짜에 따른 일상의 의(宜) · 불의(不宜)를 살펴볼 수 있는 역을 의미한다. 예컨대 백장력(白粧曆)의 경우 일과백장력(日課白粧曆)과 칠정백장력(七政白粧曆)이 있었는데 역일에 따른 일상의 금기 사항을 적은 것은 일과백장력이며, 역일에 따른 칠정의 운행을 계산하여 적어놓은 것은 칠정백장력이다. 일과백장력과 칠정백장력를 통칭할 경우는 역서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다양한 종류의 책력이 만들어졌다. 가장 대중적이고도 대량으로 만들어진 『시헌서(時憲書)』 또는 『시헌력』을 비롯하여 왕실과 고위 관리들이 사용한 『내용삼서(內用三書)』, 『천세력(千歲曆)』, 『백중력(百中曆)』과 같이 100여 년 단위의 장기적인 역서, 그리고 『칠정력(七政曆)』과 같은 천체력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시헌서』와 『내용삼서』는 1년 단위의 역서로서 매년 발행되었으며 일상생활에서 사용한 상용력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조선 후기 역서의 종류는 크게 1년 단위의 연력(年曆)과 장기적인 역서, 그리고 천체력 등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이외에도 사용한 신분층이나 수록 내용, 외장 등에 따라 내용삼서, 백장력, 첩장력(貼粧曆), 청장력일과(靑粧曆日課), 중력(中曆), 상력(常曆), 무거일과(貿去日課) 등으로 불리었다.

조선시대에 다양한 책력이 발행되었던 것은 역법에 대한 국가적인 관심과 함께 수시(授時)를 중요시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1793년에 정조가 관상감 신하들에게 “길흉을 가리는 것은 역서를 수찬하는 중요한 일이고 하늘을 공경하는 큰 도리이다.”라고 강조한 것을 보면, 하늘을 공경하고자 하는 천인합일적인 의식과 함께 정확한 역법을 바탕으로 길흉일을 가리고자 한 본의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과 함께 조선시대 서책 인쇄술의 발달 또한 다양한 역서 및 대량의 책력을 인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책력은 진상(進上)과 각 관청 및 관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 그리고 관상감에서 사적으로 가지는 것 등을 정확히 계산, 그 수만큼 인쇄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역서의 수량이 진헌하는 것 외에 4천 건이 인쇄되었으며, 이것을 각 관청과 종친, 그리고 문 · 무신의 당상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종이를 사서 개인적으로 인쇄하여 이득을 취하는 경우도 있었고 가격도 매년 일정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사용된 책력인 『시헌서(時憲書)』는 양력(陽曆)의 사용과 함께 1897년(광무 1)에 명시력(明時曆)으로 개칭되었다. 양력 사용 이후 책력은 조선민력(朝鮮民曆)을 거쳐 오늘날의 달력으로 변화되었다. 양력 사용은 점진적으로 달력의 체제도 바꾸었다. 전통 역서에서 양력이 처음 나타난 것은 양력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1896년도 역서부터이다. 1896년 역서인 “대조선개국오백오년력(大朝鮮開國五百五年曆)”을 보면, 음력(陰曆) 하단에 작은 글씨로 양력 날짜와 요일을 적어 놓고 있다. 이러한 소극적인 양력 사용의 형태는 대한제국기에 발행되어 1908년까지 사용된 명시력 때까지 이어졌다.

참고문헌

원전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시헌서(時憲書)』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내용삼서(內用三書)』
『서운관지(書雲觀志)』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단행본

이은성, 『역법의 원리분석』(정음사, 1985)
나일성, 『한국천문학사』(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정성희, 『조선후기 우주관과 역법의 이해』(지식산업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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