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8월 15일 충청남도 천안군 동면(東面) 용두리(龍頭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유애다'이다. 1919년 당시 이화학당(梨花學堂) 고등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며,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이던 유관순(柳寬順)의 사촌 언니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 휴교령을 내렸다. 학교 선배로부터 고향으로 내려가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보내라는 지시를 받은 유예도는 3월 13일 유관순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지니고 귀향하였다. 3월 16일 유관순과 함께 아버지 유중무(柳重武), 유관순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큰아버지인 유중권(柳重權), 그리고 조인원(趙仁元) 등 지역 인사 2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서울의 만세시위 상황을 알리고 독립운동 자금 모금을 호소하였다. 이와 함께 병천면(竝川面)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키자고 제안하여 동의를 받았다. 거사일은 아우내장터의 장날인 4월 1일로 정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만세시위 준비에 들어갔다.
4월 1일 아침 일찍 유관순과 함께 아우내장터 가는 길목에서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오후 1시가 되자, 조인원이 먼저 장터의 한가운데에 대형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유예도도 주동자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따라 외쳤다. 이것을 신호로 모여 있던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유예도는 유관순과 함께 대열의 선두에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병천헌병주재소의 고야마[小山] 소장 이하 헌병들이 출동하여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3,000여 명의 시위대는 이에 불응하고 만세시위를 이어 나갔다. 헌병이 발포하면서 조인원과 유중권, 유관순의 어머니인 이소제(李小悌) 등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유예도는 시위대와 함께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무차별 발포에 대해 항의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천안에서 지원 나온 철도엄호대가 병천헌병대와 합세하여 또다시 발포하였고, 이날 하루에만 모두 19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유예도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넋을 놓고 있다가 동네 어른의 손에 이끌려 외가로 피신하였다. 이후 경찰의 추격을 피해 친오빠가 있는 충청북도 진천군에 몸을 숨겼다가, 학교 동창의 아버지인 청주감리교회 한태유(韓泰裕) 목사의 도움으로 충청남도 홍성군 금마면 부평리로 피신하였다. 그곳에서 한태유의 동생인 한철유(韓哲裕)와 결혼하였고, 공소시효가 소멸된 15년 후에야 고향을 다시 찾았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