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1919년, 천안 아우내장터 3·1운동을 이끈 여성 독립운동가.
인적사항
주요 활동
4월 1일 아침 일찍 유관순과 함께 아우내장터 가는 길목에서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오후 1시가 되자, 조인원이 먼저 장터의 한가운데에 대형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유예도도 주동자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따라 외쳤다. 이것을 신호로 모여 있던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유예도는 유관순과 함께 대열의 선두에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병천헌병주재소의 고야마[小山] 소장 이하 헌병들이 출동하여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3,000여 명의 시위대는 이에 불응하고 만세시위를 이어 나갔다. 헌병이 발포하면서 조인원과 유중권, 유관순의 어머니인 이소제(李小悌) 등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유예도는 시위대와 함께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무차별 발포에 대해 항의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천안에서 지원 나온 철도엄호대가 병천헌병대와 합세하여 또다시 발포하였고, 이날 하루에만 모두 19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유예도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넋을 놓고 있다가 동네 어른의 손에 이끌려 외가로 피신하였다. 이후 경찰의 추격을 피해 친오빠가 있는 충청북도 진천군에 몸을 숨겼다가, 학교 동창의 아버지인 청주감리교회 한태유(韓泰裕) 목사의 도움으로 충청남도 홍성군 금마면 부평리로 피신하였다. 그곳에서 한태유의 동생인 한철유(韓哲裕)와 결혼하였고, 공소시효가 소멸된 15년 후에야 고향을 다시 찾았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원전
- 「판결문」(고등법원, 1919. 9. 11.)
-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19. 6. 30.)
단행본
- 이정은, 『유관순: 불꽃같은 삶, 영원한 빛』(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2004)
- 『독립운동사자료집 5: 삼일운동재판기록』(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 『독립운동사 3: 삼일운동사(하)』(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신문·잡지 기사
- 「관순이와 함께 만세 불렀다 51년만에 입 연 주동자」(『조선일보』, 1970.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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