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강학지는 조선 후기 천주교 강학 여부가 논의되는 사찰터이다. 천주교 측에서는 경기도 광주시에 소재한 천진암 터와 여주시에 소재한 주어사 터가 한국 천주교의 출발점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다만 두 사찰에서의 천주교 강학이 시작된 시기가 1777년인지 1779년인지는 논자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고 있다. 반면 두 사찰이 천주교 강학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제까지 드러난 자료들로 볼 때 어느 한쪽의 주장이 맞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發祥)과 관련된 사적지로 여겨지는 곳으로 천진암(天眞菴)과 주어사(走魚寺)가 있다. 지금은 절터만 남고 폐찰된 상태다.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로에 있는 천진암 터는 1962년 남상철(南相喆)이 확인하였고,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 주어리에 있는 주어사 터 역시 같은 해에 남상철이 근방에서 대대로 살아온 당시 86세의 박영소 노인의 도움을 받아 확인하였다.
천진암은 주어사의 부속 사찰로 언급되며, 정확한 건립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매우 오래된 사찰로 여겨진다. 정약용(丁若鏞)이 지은 권철신(權哲身)의 묘지명에는 천진암이 주어사와 함께 언급되고 있다. 정약용은 여러 차례 천진암을 유람차 방문하였으며, 강학회에는 정약용의 주변 사람들이 권철신과 함께 참여하였다. 1824년 정약용이 유배 생활을 끝내고 방문했을 때 천진암은 이미 쇠락해 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폐사가 된 것은 아니었다. 홍경모(洪敬謨)가 1847년 편찬한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 “천진암은 앵자산에 있는 오래된 사찰로, 종이를 만든다. 지금은 사옹원에 속해 있다.”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까지 천진암은 존속했으며 종이를 만들어 사옹원에 납품하며 사원경제를 뒷받침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주어사는 앵자산 동편 금사면 하품리 주어 마을 뒤에 있었던 사찰로, 1962년 당시에는 헐린 지 이미 100여 년이 되어 터만 남았다. 절터에서 《해운당 대사 의징의 비[海運堂大師義澄之碑]》가 발견되었는데 뒷면에 “숭정 기원후 무인년(1638, 인조 16)에 세웠다.”라고 비석 건립연대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주어사는 적어도 1638년 이전에 창건된 절로 추정된다. 2009년 여주군 문화재사업소의 의뢰로 ‘재단법인 겨레문화유산연구원’이 지표조사를 실시한 결과 주어사 터는 앵자봉의 산북면 자락 해발 365-400m 골짜기 사이 비탈진 곳에 있었고, 그 곳에 석축단을 쌓아 조성한 5기의 건물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2호 건물지가 사찰의 중심 건물지로, 가장 규모가 크다. 그 규모는 장축 15m, 단축 5.5m이다. 건물지들에서는 백자편, 도기편, 기와편 등이 수습되었는데, 기와는 조선시대, 그리고 백자편들은 17세기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천진암이 각종 읍지의 사찰 항목이나 고지도에 수록되었던 데 비해 주어사는 누락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주어사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절이며, 또한 왕실이나 권문세족의 후원도 받지 못했던 사찰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천진암이 주어사의 부속 암자였다고 하더라도 천진암은 비교적 규모가 큰 사찰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정약용의 묘지명에 주어사 천진암이 아닌 천진암 주어사로 언급한 것에서도 추정해 볼 수 있다.
천진암이 천주교의 성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75년부터이다. 변기영 신부는 1975년에 천진암 터 3,000여 평을 매입한 것을 시작으로 1983년까지 주위의 부지 총 20만 평을 매입하여 천주교 성지로 개발하였다. 8천 평 규모의 천진암대성당을 건립하기 위한 공사가 1987년부터 시작되었는데, 100년 계획으로 세울 예정이다. 현재 이곳에는 천진암 준본당인 광암성당, 한국천주교회 창립사 연구원, 한국 천주교 박물관, 봉쇄수도원인 가르멜 수녀원이 설립되어 있다. 천주교 창립의 주역으로 알려진 이벽(李檗), 권철신, 권일신(權日身), 이승훈(李承薰), 정약종(丁若鍾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으며 조선교구 설립자 묘역에는 정하상(丁夏祥, 유진길(劉進吉, 정철상(丁哲祥)의 묘와 함께 그 가족들의 묘역도 있다.
수원교구 홈페이지에 성지를 안내하는 곳에 주어사가 나와 있지는 않다. 지금은 절터마저도 없고 다만 입구와 절터에 주어사를 소개하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다만 이곳도 천주교에서 사적지의 하나로 여기고 있는 만큼 앞으로 수도원 등이 들어설 것으로 생각된다.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열린 강학회와 관련된 자료로는 정약용이 지은 「선중씨묘지명(先仲氏墓誌銘)」과 「녹암권철신묘지명(鹿菴權哲身墓誌銘)」, 그리고 달레(Claude Charles Dallet, 1829~1878)의 『한국천주교회사』, 그리고 이승훈을 비롯한 초기 남인 천주교인들이 지었다는 『만천유고(蔓川遺稿)』가 거론된다. 그러나 현재 만천유고는 그 역사적 신빙성을 의심받는 등 논란의 여지가 있어 신뢰하기 어렵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강학회의 구체적인 장소는 나타나지 않고 외딴 절로만 서술되어 있다. 여기에 기술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777년 눈이 덮여 있는 겨울에 권철신과 정약전을 비롯한 학자들이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외딴 절로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은 여기에 합류하기 위해 절을 찾아 나섰지만, 한밤중에 도착한 곳은 다른 절이었고, 강학이 열린 절로 다시 찾아갔다고 한다.
이들 외에 구체적으로 누가 이 강학에 참석했는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연구회는 10여 일이 걸렸으며 철학적 문제와 성현들의 윤리서를 연구하고, 끝으로 서양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지은 철학, 수학, 종교에 관한 책들을 읽고 종교의 초보적 지식을 얻은 다음 자신들이 읽은 것만을 바탕으로 즉시 종교적 실천에 들어갔다고 한다. 아침과 저녁으로 엎드려 기도한다거나 7일 중 하루는 하느님 공경에 바쳐야 해서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다른 일은 모두 쉬고 묵상에 전심하고 육식을 피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달레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국 천주교의 기원이 1777년이라고 하는 주장이 나왔다. 그리고 강학에 참석한 인물들 가운데 정약용도 포함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 정약용이 지은 권철신과 중형 정약전(丁若銓의 묘지명에 따르면 겨울에 천진암 주어사에서 강학이 열렸고 여기에 정약전과 함께 김원성(金源星), 권상학(權相學), 이총억(李寵億)과 이벽 등이 참여하였다.
권철신의 묘지명에는 “약전 형님이 공을 스승으로 섬겨 지난 기해년(1779, 정조 3) 겨울 천진암 주어사에서 강학할 때였다. 눈오는 밤에 이벽이 찾아오자 밤새워 불을 밝히고 경전을 토론했는데 그로부터 7년 뒤에 비방이 생겼으니, 이른바 성대한 자리는 두 번 다시 열리기 어렵다는 것이 이 경우라 하겠다.”고 하여 강학회의 정확한 연도를 알려주고 있다.
정약전의 묘지명에는 “어느 해 겨울에 주어사에 머물면서 학문을 익혔는데, 그때 모인 사람은 김원성 · 권상학 · 이총억 등 몇몇이었다. 녹암(鹿菴)이 직접 규칙을 정해 주고 새벽에 일어나서 얼음물로 세수한 다음 「숙야잠(夙夜箴)」을 암송하고 해가 뜨면 「경재잠(敬齋箴)」을 암송하였다. 정오(正午)가 되면 「사물잠(四勿箴)」을 암송하고 해가 지면 「서명(西銘)」을 암송하였다. 모두 엄숙하고 공손한 태도로 법도를 잃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두 묘지명에 나타난 공통점은 겨울에 열렸다는 것, 그리고 정약전이 권철신과 함께 참여하였다는 것이고, 차이점은 정확한 연도가 있고 없는 것, 그리고 참석 인물이 구체적으로 나열된 것, 그리고 이벽의 이름이 있고 없는 것 등이다. 서학에 대한 강학이 있었다는 구체적 내용은 모두 없다.
한편 정약전의 묘지명에 또 나타난 사실은 1784년 정약전과 정약용이 큰 형수의 기제사를 지내고 배를 타고 내려오면서 이벽에게 ‘천지조화의 시작과 육체와 정신, 삶과 죽음의 이치 등에 대해 들었다.’는 것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뒤 정약전이 이벽을 찾아가 『실의』와 『칠극』 등 몇 권의 책을 보고 기뻐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정약용의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는 이때 처음으로 서교에 대해 듣고 한 권의 책을 보았다고 되어 있어 정약용 형제는 적어도 1784년 이전까지는 천주교를 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도 등장하는 내용이다. 달레는 이벽이 누이의 1주기를 맞아 정약용의 집인 마재에 갔다가 1783년 초여름 4월 15일에 정약전, 정약용 형제와 배를 타고 서울로 오면서 하느님의 존재와 천지창조, 영혼의 신령성과 불멸성 등 종교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하였다. 1784년에 이승훈은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오면서 가져왔던 천주교 서적과 성물들을 가져와 이벽에게 전해주었는데, 이벽은 외딴집에 들어가 이 서적들을 탐독한 다음 은거지에서 나와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용 형제들에게 천주교를 알려주고 천주교를 전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내용도 있다.
달레의 이러한 내용과 정약용의 기록으로 판단해 볼 때 달레의 서술보다는 정약용의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본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의 내용은 달레 스스로 밝혔듯이 선교사들의 편지와 선교사들이 번역해서 보낸 조선 사람들의 보고들과 함께 선교사들이 조선에 오기 전의 내용은 다블뤼(Marie-Nicolas-Antoine Daveluy, 1818〜1866) 주교가 조선에 와서 수집하여 보낸 자료들로 이루어져 있다. 다블뤼가 신부로 조선에 도착하였을 때는 1846년으로, 이 무렵에는 당시와 관련된 인물들은 거의 없었으며 전해지는 이야기로 알았기에 그 정보가 당시의 실존 인물이었던 정약용의 기록과 비교해 정확성이 떨어질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권철신을 비롯한 젊은 학자들이 모인 강학이 있었는데, 그것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적어도 1779년에 있었던 천진암과 주어사에서의 강학 내용이 천주교와 관련된 내용은 아니며 유학과 관련된 내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천진암과 주어사가 천주교와 관련이 없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정약용이 천진암과 관련해서 지은 시 「단옷날에 두 형님을 모시고 천진암에서 노닐며[端午日 陪二兄游天眞庵]」에는 천진암은 그대로 있지만, 천진암에서 글을 읽었던 이벽이 죽고 없음을 회상하는 내용이 있다. 1779년까지는 아니지만, 그 이후에 이벽이 천주교에 대해 듣고 자신이 구할 수 있는 천주교 서적을 구해서 천진암에서 그 내용을 공부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진암과 주어사가 천주교의 강학지로 여겨지는 이유는 권철신이 이곳에서 남인에 속한 젊은 학자들과 강학을 개최하였는데, 이들이 대부분 후일 천주교와 관련된 인물들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마도 강학은 단 한 번에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달레의 주장대로 10여 일에 걸쳐서 유학에서 서양과학, 그리고 천주교로 단번에 옮겨갔다기보다는 1779년 이후 서양과학으로, 그리고 천주교로 차차 옮겨갔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추론이 될 것이다. 다만 권철신의 묘지명에 이벽이 처음 서교를 선교할 때 권철신의 집에 찾아가 10여 일을 묵은 뒤 돌아가자 권철신의 아우 권일신이 열성적으로 이벽을 따랐다는 내용이 있다.
강학이 이루어진 장소가 천진암과 주어사 중에 한 곳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 강학은 편의에 따라 두 사찰을 옮겨가며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정약전의 묘지명에는 주어사라고 명확히 밝혀져 있고, 권철신의 묘지명에는 천진암 주어사라고 표기되어 있다. 정약용이 천진암과 관련하여 지은 시에 이벽이 천진암에서 글을 읽고 있음을 회상하는 대목이 있음을 볼 때, 천진암에서도 강학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천진암과 주어사 강학이 언제부터 시작해서 언제까지 이어졌는지, 그리고 언제 끝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므로 섣불리 단언하기 어렵다. 천주교 측에서는 한국의 초기 천주교와 관련된 인물이 대다수 이 강학에 참석하였기에 아마도 여기서 천주교가 비롯되었다고 믿는 듯하다. 그러나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언제부터 천주교와 관련된 토론이나 강학이 있었는지 역사적으로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이처럼 천진암과 주어사의 천주교 강학에 관해서는 각자의 입장에 맞추어 역사적 사료들에 행간의 의미를 부여하며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되도록 그 사료의 내용 그대로를 충실하게 해석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천주교 측의 인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 출발점에서 이웃 종교인 불교에 도움을 받았으므로 그 도움에 대한 인식도 수용하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