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대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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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성곽. 토성.
당토성 (唐土城)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성곽. 토성.
한강유역에 있었던 마한(馬韓)의 소국(小國).
백제국 (伯濟國)
한강유역에 있었던 마한(馬韓)의 소국(小國).
미천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15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300~331년이다. 서천왕의 손자로 아버지가 봉상왕에 의해 반역혐의로 죽임을 당하자 피신해 소금장수를 하며 살다가 봉상왕 폐위 후 국상 창조리 등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다. 재위 중에 중국 진나라가 와해되는 국제적 격동기를 맞아 대외팽창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낙랑군과 대방군을 병합했고 현도성을 공격하는 등 남방으로 급속한 팽창을 도모했다. 선비족 일파인 모용부와 요동지방을 두고 오랫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다. 재위 32년 만에 죽자 미천지원에 장사 지냈다.
미천왕 (美川王)
미천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15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300~331년이다. 서천왕의 손자로 아버지가 봉상왕에 의해 반역혐의로 죽임을 당하자 피신해 소금장수를 하며 살다가 봉상왕 폐위 후 국상 창조리 등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다. 재위 중에 중국 진나라가 와해되는 국제적 격동기를 맞아 대외팽창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낙랑군과 대방군을 병합했고 현도성을 공격하는 등 남방으로 급속한 팽창을 도모했다. 선비족 일파인 모용부와 요동지방을 두고 오랫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다. 재위 32년 만에 죽자 미천지원에 장사 지냈다.
봉산송산리고분(鳳山松山里古墳)은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벽돌무덤 · 덧널무덤으로 이루어진 낙랑군의 무덤군이다. 1917년 송산리 제1호분이라는 이름으로 야쓰이 세이이쓰에 의해 조사되었으나 정식 보고는 되지 않았으며, 광복 이후 북한이 봉산송산리고분에서 발굴한 덧널무덤이 동일한 고분군인지는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송산리에서 덧널무덤과 벽돌무덤이 발견된 점은 대방군 지역으로 이해되는 봉산군 일대의 주요 무덤 형태와 일치하고 있다. 대방군치지라 알려진 고당성 동북쪽에 있어 대방군 관련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봉산 송산리 고분 (鳳山 松山里 古墳)
봉산송산리고분(鳳山松山里古墳)은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벽돌무덤 · 덧널무덤으로 이루어진 낙랑군의 무덤군이다. 1917년 송산리 제1호분이라는 이름으로 야쓰이 세이이쓰에 의해 조사되었으나 정식 보고는 되지 않았으며, 광복 이후 북한이 봉산송산리고분에서 발굴한 덧널무덤이 동일한 고분군인지는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송산리에서 덧널무덤과 벽돌무덤이 발견된 점은 대방군 지역으로 이해되는 봉산군 일대의 주요 무덤 형태와 일치하고 있다. 대방군치지라 알려진 고당성 동북쪽에 있어 대방군 관련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봉산양동리고분군(鳳山養洞里古墳群)은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낙랑군의 무덤군이다. 1917년과 1922년에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으나 전모가 알려진 것은 양동리 3 · 5호분이다. 양동리 3 · 5호분은 방대형 분구와 궁륭형 천장의 전형적인 낙랑계 벽돌무덤이다. 출토된 각종 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피장자는 군현에서 활동한 인물로 추정된다. 무덤의 구조나 토기의 양상으로 보아 양동리 3 · 5호분의 추정 연대는 3세기 전반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지역에 축조된 벽돌무덤의 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봉산 양동리 고분군 (鳳山 養洞里 古墳群)
봉산양동리고분군(鳳山養洞里古墳群)은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낙랑군의 무덤군이다. 1917년과 1922년에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으나 전모가 알려진 것은 양동리 3 · 5호분이다. 양동리 3 · 5호분은 방대형 분구와 궁륭형 천장의 전형적인 낙랑계 벽돌무덤이다. 출토된 각종 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피장자는 군현에서 활동한 인물로 추정된다. 무덤의 구조나 토기의 양상으로 보아 양동리 3 · 5호분의 추정 연대는 3세기 전반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지역에 축조된 벽돌무덤의 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봉산입봉리고분군(鳳山立峯里古墳群)은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대방군의 무덤으로 알려진 덧널무덤이다. 1917년 야쓰이 세이이쓰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이를 입봉리 9호고분이라고 칭한 것으로 보아 입봉리에 있는 고분에 일련번호를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출토된 유물은 모두 토기류인데 그 중에서 석영혼입계 백색토기 항아리가 출토된 점에서 유적의 연대는 대방군 설치 이전의 시기인 1세기 중엽으로 소급된다.
봉산 입봉리 고분군 (鳳山 立峯里 古墳群)
봉산입봉리고분군(鳳山立峯里古墳群)은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대방군의 무덤으로 알려진 덧널무덤이다. 1917년 야쓰이 세이이쓰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이를 입봉리 9호고분이라고 칭한 것으로 보아 입봉리에 있는 고분에 일련번호를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출토된 유물은 모두 토기류인데 그 중에서 석영혼입계 백색토기 항아리가 출토된 점에서 유적의 연대는 대방군 설치 이전의 시기인 1세기 중엽으로 소급된다.
왕경묘(王卿墓)는 황해남도 신천군 새길리에 있는 대방군 장잠현 현장 왕경의 무덤으로 알려진 벽돌덧널무덤이다. 1962년 농업협동조합에서 진행한 건설공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네 벽과 바닥은 벽돌로 쌓은 반면, 천장은 널돌로 편평하게 덮여 있는 점은 고구려 돌방무덤과 비슷한 점이 있어 벽돌방무덤에서 돌방무덤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형태로 판단되기도 한다. 무덤에서 발견된 묘지명 벽돌에서는 '장잠현(守長岑) 현장(縣長) 왕경(王卿)'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대방군 장잠현의 위치 비정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왕경묘 (王卿墓)
왕경묘(王卿墓)는 황해남도 신천군 새길리에 있는 대방군 장잠현 현장 왕경의 무덤으로 알려진 벽돌덧널무덤이다. 1962년 농업협동조합에서 진행한 건설공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네 벽과 바닥은 벽돌로 쌓은 반면, 천장은 널돌로 편평하게 덮여 있는 점은 고구려 돌방무덤과 비슷한 점이 있어 벽돌방무덤에서 돌방무덤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형태로 판단되기도 한다. 무덤에서 발견된 묘지명 벽돌에서는 '장잠현(守長岑) 현장(縣長) 왕경(王卿)'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대방군 장잠현의 위치 비정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평안북도 의주에서 압록강 맞은편 지역에 있었던 고구려시대의 지명.
서안평 (西安平)
평안북도 의주에서 압록강 맞은편 지역에 있었던 고구려시대의 지명.
은율관산리고분(殷栗冠山里古墳)은 황해남도 은율군 은율읍 관산리에 있는 낙랑군 · 대방군 시기의 고분군이다. 관광산 남사면에 분포하는 21기의 고분으로 이루어졌다. 그 중 관광산 자락 남쪽에 자리한 고분 2기를 북한에서 조사하였다. 관산리1호분과 2호분은 지상에 봉토분구를 가진 천장까지 벽돌로 축조한 벽돌무덤이다. 서북한 일대의 벽돌무덤과 비교해 볼 때 이 무덤은 2세기 중엽에서 3세기 대에 조성된 낙랑군 · 대방군 시기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은율 관산리 고분 (殷栗 冠山里 古墳)
은율관산리고분(殷栗冠山里古墳)은 황해남도 은율군 은율읍 관산리에 있는 낙랑군 · 대방군 시기의 고분군이다. 관광산 남사면에 분포하는 21기의 고분으로 이루어졌다. 그 중 관광산 자락 남쪽에 자리한 고분 2기를 북한에서 조사하였다. 관산리1호분과 2호분은 지상에 봉토분구를 가진 천장까지 벽돌로 축조한 벽돌무덤이다. 서북한 일대의 벽돌무덤과 비교해 볼 때 이 무덤은 2세기 중엽에서 3세기 대에 조성된 낙랑군 · 대방군 시기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장무이묘(張撫夷墓)는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대방군 태수 장무이의 벽돌방무덤이다. 봉산군에서 문자벽돌이 채집되면서 주민들 사이에서 도총이라고 불리던 무덤에 대하여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1911년 최초로 조사를 실시하었다. 부장 유물은 이미 도굴되어 거의 남지 않았는데, 문자벽돌이 발견되어 무덤의 주인이 장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피장자는 낙랑 · 대방군의 멸망과 함께 망명하여 허호를 받은 중국계 인물로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장무이묘는 고구려에 의해 4세기 중엽경에 축조된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
장무이 묘 (張撫夷 墓)
장무이묘(張撫夷墓)는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대방군 태수 장무이의 벽돌방무덤이다. 봉산군에서 문자벽돌이 채집되면서 주민들 사이에서 도총이라고 불리던 무덤에 대하여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1911년 최초로 조사를 실시하었다. 부장 유물은 이미 도굴되어 거의 남지 않았는데, 문자벽돌이 발견되어 무덤의 주인이 장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피장자는 낙랑 · 대방군의 멸망과 함께 망명하여 허호를 받은 중국계 인물로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장무이묘는 고구려에 의해 4세기 중엽경에 축조된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
369년 백제가 치양에서 고구려와 싸워 크게 이긴 전투.
치양전투 (雉壤戰鬪)
369년 백제가 치양에서 고구려와 싸워 크게 이긴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