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부산정치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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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문은 해방 이후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장, 수도사단장, 남부지구 경비사령관 등을 역임한 군인이다. 1916년에 태어나 1953년에 사망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주둔 참모본부인 대본영에서 근무하였다. 남방전선으로 전속되었다가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현지인의 도움으로 풀려나 귀국하였다. 귀국 후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1948년 육사 제8기 특대생으로 소령에 임관하였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군의 중립을 내세우며 병력 차출 명령을 거부하였다가 수도사단장으로 전보되었다. 1953년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을 지휘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이용문 (李龍文)
이용문은 해방 이후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장, 수도사단장, 남부지구 경비사령관 등을 역임한 군인이다. 1916년에 태어나 1953년에 사망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주둔 참모본부인 대본영에서 근무하였다. 남방전선으로 전속되었다가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현지인의 도움으로 풀려나 귀국하였다. 귀국 후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1948년 육사 제8기 특대생으로 소령에 임관하였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군의 중립을 내세우며 병력 차출 명령을 거부하였다가 수도사단장으로 전보되었다. 1953년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을 지휘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장석윤은 일제강점기 때, 미국 전략첩보국(OSS) 소속으로 활동하였으며 해방 이후, 내무부 차관, 민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이다. 1904년 출생하여 2004년 사망했다. 1924년 뉴욕에서 처음 이승만을 대면하고 그의 추천으로 태평양전쟁 때 미국 전략첩보국 소속으로 활동했다. 1950년 내무부 치안국장에 기용되어 보도연맹 사건의 책임자가 되었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국도신문』을 인수해, 1951년 2월 1일부터 신문을 속간했다. 1951년 제7대 내무부 차관에 임명, 1954년(3대), 1958년(4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장석윤 (張錫潤)
장석윤은 일제강점기 때, 미국 전략첩보국(OSS) 소속으로 활동하였으며 해방 이후, 내무부 차관, 민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이다. 1904년 출생하여 2004년 사망했다. 1924년 뉴욕에서 처음 이승만을 대면하고 그의 추천으로 태평양전쟁 때 미국 전략첩보국 소속으로 활동했다. 1950년 내무부 치안국장에 기용되어 보도연맹 사건의 책임자가 되었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국도신문』을 인수해, 1951년 2월 1일부터 신문을 속간했다. 1951년 제7대 내무부 차관에 임명, 1954년(3대), 1958년(4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윤택중은 단국대학교 학장, 문교부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교육자이다. 1913년 전라북도 익산군 출생으로, 중앙고보 재학 중 제2회 전조선 남녀전문학생토론대회에서 개회사를 발표했다. 1943년 일본 주오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으며, 해방 직후 고려청년당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50년 익산을 선거구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1년 문교부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실각했다. 이후 민중당, 신한당, 민주통일당에서 활동하며 정치 활동을 지속했으며, 민족문화 보존과 민족사 바로 찾기에 힘썼다. 2002년 88세로 사망했다.
윤택중 (尹宅重)
윤택중은 단국대학교 학장, 문교부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교육자이다. 1913년 전라북도 익산군 출생으로, 중앙고보 재학 중 제2회 전조선 남녀전문학생토론대회에서 개회사를 발표했다. 1943년 일본 주오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으며, 해방 직후 고려청년당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50년 익산을 선거구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1년 문교부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실각했다. 이후 민중당, 신한당, 민주통일당에서 활동하며 정치 활동을 지속했으며, 민족문화 보존과 민족사 바로 찾기에 힘썼다. 2002년 88세로 사망했다.
개헌안부결반대운동(改憲案否決反對運動)은 1952년에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되자 이승만 정부가 국회를 압박하여 결과를 번복하기 위해, 관제 조직들을 동원하여 전개한 대중집회와 시위이다. 1952년 1월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큰 표 차이로 부결되자, 이승만 정부는 이를 번복하기 위해 관제 조직들을 동원하여 국회의원 소환, 국회 해산 등을 주장하는 집회와 시위를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1952년 5월 25일 임시 수도 부산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는 부산정치파동으로 이어졌다.
개헌안 부결 반대운동 (改憲案 否決 反對運動)
개헌안부결반대운동(改憲案否決反對運動)은 1952년에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되자 이승만 정부가 국회를 압박하여 결과를 번복하기 위해, 관제 조직들을 동원하여 전개한 대중집회와 시위이다. 1952년 1월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큰 표 차이로 부결되자, 이승만 정부는 이를 번복하기 위해 관제 조직들을 동원하여 국회의원 소환, 국회 해산 등을 주장하는 집회와 시위를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1952년 5월 25일 임시 수도 부산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는 부산정치파동으로 이어졌다.
제2대 국회의원, 김천시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여영복 (呂永複)
제2대 국회의원, 김천시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민중자결단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 당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 통과와 국회 해산을 주장한 친이승만 계열의 단체이다. 1952년 5월 24일 대규모 인원을 동원해 민중자결선포대회를 개최하는 등 각종 시위와 폭력 행동에 앞장섰다. 1952년 제2대 정부통령선거에서는 이승만의 재출마운동을 벌였고, 1954년 제3대 총선을 앞두고 이승만이 추진하는 개헌운동에도 동원되었다.
민중자결단 (民衆自決團)
민중자결단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 당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 통과와 국회 해산을 주장한 친이승만 계열의 단체이다. 1952년 5월 24일 대규모 인원을 동원해 민중자결선포대회를 개최하는 등 각종 시위와 폭력 행동에 앞장섰다. 1952년 제2대 정부통령선거에서는 이승만의 재출마운동을 벌였고, 1954년 제3대 총선을 앞두고 이승만이 추진하는 개헌운동에도 동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