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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
인물
해방 이후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장, 수도사단장, 남부지구 경비사령관 등을 역임한 군인.
이칭
이칭
만취(晩翠)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6년
사망 연도
1953년
본관
안악(安岳)
출생지
평안남도 평양
관련 사건
부산정치파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이용문은 해방 이후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장, 수도사단장, 남부지구 경비사령관 등을 역임한 군인이다. 1916년에 태어나 1953년에 사망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주둔 참모본부인 대본영에서 근무하였다. 남방전선으로 전속되었다가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현지인의 도움으로 풀려나 귀국하였다. 귀국 후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1948년 육사 제8기 특대생으로 소령에 임관하였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군의 중립을 내세우며 병력 차출 명령을 거부하였다가 수도사단장으로 전보되었다. 1953년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을 지휘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목차
정의
해방 이후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장, 수도사단장, 남부지구 경비사령관 등을 역임한 군인.
내용

1916년 1월 22일 평안남도 평양 출생으로,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4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육군사관학교 재학 중 기계체조수영선수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1937년 12월 제50기생으로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되어 도쿄 주둔 제1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이후 부대 이동으로 만주의 손오기지(孫吳基地)에 파견되었다.

1939년 중위로 진급한 후 도쿄의 기병학교에서 10개월 간 교육을 받았으며, 12월 20일 평양에서 결혼을 했다. 이후 1940년 북만주 카이펑[開封]에서 수비대장으로 근무하다가 1941년 대위로 진급했으며, 1942년 도쿄 주둔 참모본부인 대본영(大本營)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 육사 출신의 한국인 가운데 대본영에서 근무한 사람은 홍사익 중장과 이용문 소장 둘 뿐이었다.

1943년 남방전선으로 전속되어 말레이시아, 수마트라, 버마 등지에서 근무했으며, 1944년에 소좌로 승진해 남방군 교통사령부 참모가 되었다. 1945년 사이공에서 종전을 맞이했고, 일본의 패망으로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지만 일본군 사령부 군수참모 재직 시 가깝게 지냈던 베트남인 납품업자의 도움으로 풀려나, 1947년 9월 인천을 통해 귀국했다.

귀국 후 1년여 동안 홍콩, 상하이 등에서 무역업을 하다가 국방부 참모총장이던 채병덕이종찬 등의 권고로 1948년 11월 군에 입대해 육사 제8기 특대생으로서 소령으로 임관했으며 한 달 후 중령으로 진급해 초대 기갑연대장에 취임했다. 이듬해 4월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8월 초 육군본부 정보국장이 되었다. 1949년 10월 육군본부를 떠나 옹진전투사령관으로 부임했으며, 전남병사구사령관 등을 지내다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6월 10일 육군참모학교 부교장으로 임명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소수 병력으로 정릉, 미아리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으나 북한 전차대의 공격을 받고 부대가 와해되었고, 한강 철교 폭파 뒤 한강 도하를 수차례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해 3개월 동안 은신생활을 하기도 했다. 1950년 9 · 28 서울 수복 이후 군에 복귀했다. 이후 강원도 계엄민사부장, 육군종합학교 기획처장으로 근무했으며, 이듬해 3월 제9사단 부사단장이 되어 현리작전을 펼쳤다.

1951년 6월 이종찬 소장이 총참모장에 취임하게 되면서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장으로 임명되었고, 준장으로 진급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육군 참모총장 이종찬과 함께 군의 중립을 내세워 국방장관 신태영의 병력 차출 명령을 거부하기도 했다. 당시 이종찬 참모총장은 국회의원 통근차가 헌병대로 끌려간 5월 26일 대구 육본에서 열린 참모회의를 통해 군이 정치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육본 훈령 217호「육군 장병에게 고함」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육군 참모총장 이종찬은 해임되었으며, 이용문은 육군본부에서 밀려나 7월 11일에 수도사단장으로 전보되었다.

1952년 9월 6일부터 9월 20일까지 15일 간에 걸쳐 수행된 수도고지와 지형능선 쟁탈전에 지휘관으로 참여했으며, 10월 남부지구 경비사령관으로 부임해 지리산에 잔류하고 있는 공비토벌의 임무를 수행했다. 1953년 6월 24일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을 지휘하던 중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상공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사후 육군 소장으로 추서되었으며, 장례는 육군장으로 치러졌다. 1961년 5 · 16군사정변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은 대구 근교에 있던 그의 묘소를 수유리로 옮기는 이장위원회 위원장 맡기도 했으며,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68년부터 매년 ‘이용문 장군배 승마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참고문헌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3 (조갑제, 조선일보사, 1998)
『젊은 거인의 초상』(조갑제, 샘터, 1988)
『비극의 군인들: 일본육사출신의 역사』(이기동, 일조각, 1982)
『한국인물대계』9 (한국인물대계편찬위원회, 박우사, 1972)
『자유민에게 전해다오』1 (김종문, 1955)
「백승수 비월 우승 이용문 장군배 승마대회」(『경향신문』, 1996.9.14)
「이용문 소장 육군장 엄수」(『동아일보』, 1953.7.1)
「서남지구사령관 이용문 준장 순직」(『동아일보』, 1953.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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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임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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