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진은 해방 이후 재무부장관, 국무총리,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908년 황해도 신천 출생으로, 1934년 일본 도쿄상과대학을 졸업한 후 해방까지 조선은행에서 근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9년 외자총국장, 1951년 재무부 장관, 1953년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재무장관 시절인 1951년 「임시토지수득세법」을 통과시켰으며, 1953년 통화팽창을 수습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다. 이후 민의원, 국회의원, 국회의장 등을 역임하였고, 10·26사건 이후 공직에서 물러난 후 1993년 사망하였다.
1908년 10월 7일 황해도 신천군 출생으로, 1928년 휘문고등보통학교, 1934년 일본 도쿄상과대학을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후, 1934년 4월부터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조선은행에서 근무하였다. 1945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조선은행 총재로 스미스(Roland D. Smith) 해군 소령이 임명되었고, 백두진은 1945년 12월 31일 김성권, 구용서, 김문성, 최순주 등과 함께 조선은행 이사가 되었다.
미군정이 조선은행을 통해 민족청년단에 재정을 지원하였는데, 이때 재정담당 이사로서 청년단과 관계를 맺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1949년 1월 22일 외자총국장에 임명되었으며, 외자총국은 이후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에 원조 협정」(1948년 12월 10일 체결)에 따라 외자관리청으로 정부 조직에 편입되었다.
한국전쟁이 한창 중이던 1950년 10월 외자관리청장직을 사임하고, 며칠이 지난 10월 25일 식산은행 두취(頭取) 곧 은행장으로 취임하였다. 1951년 3월 최순주의 후임으로 재무부 장관이 되었으며, 기획처장도 겸직하였다.
1952년 5월 24일 「대한민국과 통일사령부 간의 경제 조정에 관한 협정」(일명 마이어 협정)에 따라 한미합동경제위원회(CEB, Combined Economic Board)가 7월에 설치되었는데, 이때 한국 측 대표로 임명되었다. 1952년 10월에는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되어 재무부 장관과 국무총리 서리를 겸직하였으며, 1953년 4월 정식으로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1954년 6월 국무총리를 사퇴한 뒤에는 이승만의 요청으로 경제조정관이 되어 한미합동경제위원회 한국 측 대표직을 1956년 5월까지 수행하였다.
백두진이 재무장관으로서 재임하면서 수행한 대표적인 일은 1951년 9월 9일 「임시토지수득세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킨 일과, 한국전쟁 이후 통화발행고의 증대로 인한 급격한 통화팽창을 수습하기 위해 1953년 2월 화폐개혁을 단행한 일이다.
국무총리 재직 시절, ‘중석불 사건(重石弗事件)’을 일으킨 책임자로 비판을 받았으며, 경제조정관 재직 시절, ‘부정대부 사건(不正貸付事件)’으로 3대 국회에서 공직추방결의를 당하였다. 그는 회고록에서 “그 말썽거리였던 중석불 사건도 나와 관계가 없는 것으로 명명백백해지고 말았다. 부정축재처리위원장 이주일 장군은 나의 무혐의를 증명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1956년 5월 경제조정관을 사임한 후, 1961년 4월 24일에 실시된 제5대 민의원 보궐선거에서 경기도 이천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으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으며,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발표한 「부정축재처리 기본 요강」에 따라 부정축재 혐의로 5월 28일 체포되었다가 8월 13일에 무혐의로 석방되었고, 이후 몇 년 간의 정치적 공백 기간을 거쳤다.
1967년 공화당에 입당하여,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70년 12월에는 정일권의 후임으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이후 1971년 5월 25일에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 의원에 당선되었다.
1971년 6월 3일 총리직을 사임하였고, 7월 26일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될 때까지 국회의장직을 수행하였으며,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신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유신정우회 의장 겸 정책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유신정우회 의장을 거쳐 1979년 10대 국회 때는 “민의로 선출되지 않은 국회의원이 의장으로 선출될 수 없다”는 야당의 반대에 부딪치는 등 이른바 ‘백두진 파동’이 일어났으나, 국회의장에 다시 선출되었다.
1979년 10·26사건 이후 공직에서 물러났으며, 1993년 9월 5일 사망하였다. 저서로 『백두진 회고록』을 남겼다.
1970년 한국 수교훈장 광화장(修交勳章光化章), 1971년 일본 훈1등 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 1972년 필리핀 외교훈장(外交勳章, Sikatune Datu), 1972년 대만 특종 대수경성 훈장(特種大綬景星勳章)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