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신한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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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마을인 신한촌의 자치기구.
신한촌민회 (新韓村民會)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마을인 신한촌의 자치기구.
1920년 4월 일본군이 한인을 학살한 사건.
4월참변 (四月慘變)
1920년 4월 일본군이 한인을 학살한 사건.
조선인거류민회는 1920년 5월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이 한인들을 회유, 통제하기 위해 조직한 자치단체이다. 신한촌(新韓村)에 사무소를 두었으며, 일제가 한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기관으로 관광단, 음악단을 꾸려 경성을 시찰하기도 하였다.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전개했던 간화회(墾話會)와는 차별성을 가졌다.
조선인거류민회 (朝鮮人居留民會)
조선인거류민회는 1920년 5월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이 한인들을 회유, 통제하기 위해 조직한 자치단체이다. 신한촌(新韓村)에 사무소를 두었으며, 일제가 한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기관으로 관광단, 음악단을 꾸려 경성을 시찰하기도 하였다.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전개했던 간화회(墾話會)와는 차별성을 가졌다.
일제강점기 때, 철혈광복단, 북로군정서 등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임국정 (林國楨)
일제강점기 때, 철혈광복단, 북로군정서 등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개척리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던 초기 한인마을이다. 개척리는 ‘개체기’, ‘카레이스카야 슬라보트카’라고도 불렸다. 1870년대 군항 건설과 연해주 개발이 시작되면서 일자리를 찾아온 한인들이 시 광장 주변에 살았다. 1885년과 1892년 콜레라가 발생하자 시 당국은 한인 거주지를 아무르만에 접한 남쪽 언덕으로 옮겼다. 이곳을 러시아인들이 ‘고려인촌’, ‘한인촌’이란 의미로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라 하였다. 1911년 러시아 당국은 전염병을 핑계로 개척리 거주 한인들을 시의 서북쪽으로 이주시켰다. 새로운 한인촌은 이후 한인사회의 새로운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개척리 (開拓里)
개척리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던 초기 한인마을이다. 개척리는 ‘개체기’, ‘카레이스카야 슬라보트카’라고도 불렸다. 1870년대 군항 건설과 연해주 개발이 시작되면서 일자리를 찾아온 한인들이 시 광장 주변에 살았다. 1885년과 1892년 콜레라가 발생하자 시 당국은 한인 거주지를 아무르만에 접한 남쪽 언덕으로 옮겼다. 이곳을 러시아인들이 ‘고려인촌’, ‘한인촌’이란 의미로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라 하였다. 1911년 러시아 당국은 전염병을 핑계로 개척리 거주 한인들을 시의 서북쪽으로 이주시켰다. 새로운 한인촌은 이후 한인사회의 새로운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김치보는 평안남도 평양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청년돈의회, 성명회, 권업회 등 한인 사회단체에서 활동하였으며, 대한국민의회를 비롯한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 단체에서 재정을 담당하는 등 다양한 활동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치보 (金致寶)
김치보는 평안남도 평양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청년돈의회, 성명회, 권업회 등 한인 사회단체에서 활동하였으며, 대한국민의회를 비롯한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 단체에서 재정을 담당하는 등 다양한 활동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유상돈은 일제강점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신한촌에서 조직된 권업회, 대한노인동맹단 등에서 활동하였다. 조선독립단 결사대, 동양혁명대의단 등에서 활동하며 러시아 한인 사회의 무장투쟁과 사회주의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독립운동가이다.
유상돈 (劉尙敦)
유상돈은 일제강점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신한촌에서 조직된 권업회, 대한노인동맹단 등에서 활동하였다. 조선독립단 결사대, 동양혁명대의단 등에서 활동하며 러시아 한인 사회의 무장투쟁과 사회주의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독립운동가이다.
최봉준은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여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한 후 한인들의 교육 활동과 권익 확보에 힘썼다. 1905년 『해조신문』을 창간하였고, 1909년에는 신문을 통해 안중근 의거를 대대적으로 알렸다. 연해주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성명회를 조직하고, 러시아 한인 중앙총회에서 활동하는 등 초기 러시아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다.
최봉준 (崔鳳俊)
최봉준은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여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한 후 한인들의 교육 활동과 권익 확보에 힘썼다. 1905년 『해조신문』을 창간하였고, 1909년에는 신문을 통해 안중근 의거를 대대적으로 알렸다. 연해주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성명회를 조직하고, 러시아 한인 중앙총회에서 활동하는 등 초기 러시아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