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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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제21대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 (暎嬪 李氏)
조선후기 제21대 영조의 후궁.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대학교에 있는 조선후기 영조의 탕평책 관련 비. 탕평비.
탕평비 (蕩平碑)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대학교에 있는 조선후기 영조의 탕평책 관련 비. 탕평비.
임오화변은 1762년(영조 38) 영조가 대리청정 중인 사도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이다. 임오화변의 배경은 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적 갈등, 신임의리를 둘러싼 노·소론 당론의 대결 구도, 세자를 둘러싸고 궁중 세력과 연계된 당파 간 갈등 등이 있다. 세자의 비행을 고발한 일을 계기로 영빈이씨가 영조에게 세자의 심각한 병증과 예측 불가능한 변란 위험을 실토하자 영조는 결국 임오화변을 벌였다. 후에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에게 왕위를 계승하였다. 임오화변은 영조대 후반부터 순조대까지의 주요 정치적 쟁점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된다.
임오화변 (壬午禍變)
임오화변은 1762년(영조 38) 영조가 대리청정 중인 사도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이다. 임오화변의 배경은 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적 갈등, 신임의리를 둘러싼 노·소론 당론의 대결 구도, 세자를 둘러싸고 궁중 세력과 연계된 당파 간 갈등 등이 있다. 세자의 비행을 고발한 일을 계기로 영빈이씨가 영조에게 세자의 심각한 병증과 예측 불가능한 변란 위험을 실토하자 영조는 결국 임오화변을 벌였다. 후에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에게 왕위를 계승하였다. 임오화변은 영조대 후반부터 순조대까지의 주요 정치적 쟁점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된다.
유수원은 조선 후기 정언, 태천현감 등을 역임하고 『우서(迂書)』를 집필한 문신이다. 소론 준론계 가문 출신으로 관직 생활 초반에는 벼슬살이가 평탄하지 않았다. 높은 학식과 재주를 인정받았는데, 조선의 전면적인 개혁을 주장한 『우서』는 탕평책을 추진한 영조로부터도 인정을 받아 이조전랑의 통청권과 한림의 추천권 개혁에 영향을 주었다. 대역죄로 사형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나, ‘사민분업’과 상공업 증진을 주장한 개혁론으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로서 주목을 받았다.
유수원 (柳壽垣)
유수원은 조선 후기 정언, 태천현감 등을 역임하고 『우서(迂書)』를 집필한 문신이다. 소론 준론계 가문 출신으로 관직 생활 초반에는 벼슬살이가 평탄하지 않았다. 높은 학식과 재주를 인정받았는데, 조선의 전면적인 개혁을 주장한 『우서』는 탕평책을 추진한 영조로부터도 인정을 받아 이조전랑의 통청권과 한림의 추천권 개혁에 영향을 주었다. 대역죄로 사형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나, ‘사민분업’과 상공업 증진을 주장한 개혁론으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로서 주목을 받았다.
인원왕후(仁元王后)는 조선시대, 제19대 왕 숙종의 계비이다. 본관은 경주이고, 이조판서 김남중(金南重)의 3대손이며,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과 가림부부인(嘉林府夫人) 임천 조씨(林川 趙氏)의 딸이다. 1702년 16세에 숙종의 세 번째 간택 왕비가 되었다. 소생은 없었고 연잉군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여 세제(世弟)가 된 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71세에 사망하였다.
인원왕후 (仁元王后)
인원왕후(仁元王后)는 조선시대, 제19대 왕 숙종의 계비이다. 본관은 경주이고, 이조판서 김남중(金南重)의 3대손이며,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과 가림부부인(嘉林府夫人) 임천 조씨(林川 趙氏)의 딸이다. 1702년 16세에 숙종의 세 번째 간택 왕비가 되었다. 소생은 없었고 연잉군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여 세제(世弟)가 된 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71세에 사망하였다.
조선후기 제23대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 (純元王后)
조선후기 제23대 순조의 왕비.
조선후기 제21대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 (貞聖王后)
조선후기 제21대 영조의 왕비.
시파(時派)는 조선 후기 정조의 탕평책에 의한 한 정파이다. 영조대 중 · 후반에 성립한 노론 북당(北黨)과 동당(東黨) 계열 인사들이 정조의 의리탕평에 호응하여 소론과 협력하며 정국을 주도하던 세력이다. 이들은 정조 대에는 군주가 설정한 시의(時議)에 순응하며 의리탕평에 호응한 노론 주류 세력이 되었으며, 순조 대 이후 시파의 영수인 안동 김씨 외척은 노 · 소론 경화 벌열가를 이끌며 세도정치를 주도하였다.
시파 (時派)
시파(時派)는 조선 후기 정조의 탕평책에 의한 한 정파이다. 영조대 중 · 후반에 성립한 노론 북당(北黨)과 동당(東黨) 계열 인사들이 정조의 의리탕평에 호응하여 소론과 협력하며 정국을 주도하던 세력이다. 이들은 정조 대에는 군주가 설정한 시의(時議)에 순응하며 의리탕평에 호응한 노론 주류 세력이 되었으며, 순조 대 이후 시파의 영수인 안동 김씨 외척은 노 · 소론 경화 벌열가를 이끌며 세도정치를 주도하였다.
김한구는 조선 후기 영조의 장인으로 영돈녕부사와 어영대장, 장악원제조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아버지로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의 작호를 받았으며, 영조 이후에는 정순왕후와 함께 정국에 영향을 미쳤다.
김한구 (金漢耉)
김한구는 조선 후기 영조의 장인으로 영돈녕부사와 어영대장, 장악원제조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아버지로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의 작호를 받았으며, 영조 이후에는 정순왕후와 함께 정국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 영조 때,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0세에 요절한 후 정조에 의해 추존된 왕.
진종 (眞宗)
조선 영조 때,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0세에 요절한 후 정조에 의해 추존된 왕.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광덕산(廣德山)에 있는 고려시대 에 창건된 사찰.
광덕산 심복사 (廣德山 深福寺)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광덕산(廣德山)에 있는 고려시대 에 창건된 사찰.
영조 어필 - 숙빈최씨사우제문 원고는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가 1726년에 쓴 원고이다. 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영조가 돌아가신 생모 숙빈 최씨의 생신을 맞아 사당에 나아가 전배례를 행하고자 쓴 것이다. 제문을 보면 영조는 경종의 국상이 끝난 1726년에서야 전배례를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 구절에서는 숙빈 최씨에 대한 애절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제문 뒤쪽에는 영조가 후궁이던 정빈 이씨의 사당에 올리는 짧은 축사가 딸려 있다. 이 어필은 영조 33세에 쓴 이른 필적으로 숙빈 최씨 관련 영조의 어제어필을 대표한다.
영조 어필 - 숙빈최씨사우제문 원고 (英祖 御筆 - 淑嬪崔氏祠宇祭文 原稿)
영조 어필 - 숙빈최씨사우제문 원고는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가 1726년에 쓴 원고이다. 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영조가 돌아가신 생모 숙빈 최씨의 생신을 맞아 사당에 나아가 전배례를 행하고자 쓴 것이다. 제문을 보면 영조는 경종의 국상이 끝난 1726년에서야 전배례를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 구절에서는 숙빈 최씨에 대한 애절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제문 뒤쪽에는 영조가 후궁이던 정빈 이씨의 사당에 올리는 짧은 축사가 딸려 있다. 이 어필은 영조 33세에 쓴 이른 필적으로 숙빈 최씨 관련 영조의 어제어필을 대표한다.
영조실록은 1778년(정조 2)에서 1781년(정조 5) 사이에 편찬한, 영조 재위 52년간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를 기록한 실록이다. 127권 83책의 활자본이다. 1889년(고종 26)에 ‘영종’의 묘호(廟號)를 ‘영조’로 추존했기 때문에 ‘영조실록’이라 통칭하고 있다.
영조실록 (英祖實錄)
영조실록은 1778년(정조 2)에서 1781년(정조 5) 사이에 편찬한, 영조 재위 52년간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를 기록한 실록이다. 127권 83책의 활자본이다. 1889년(고종 26)에 ‘영종’의 묘호(廟號)를 ‘영조’로 추존했기 때문에 ‘영조실록’이라 통칭하고 있다.
영조대왕의 도포는 1979년 파계사 원통전(圓通殿)의 관세음보살상을 개금(改金)하다가 발견된 18세기 대표적인 도포 유물이다. 함께 발견된 발원문과 도포 뒷길 안쪽에 부착된 한지 묵서를 통해 1740년(영조 16) 경신(庚申) 12월 11일에 영조대왕의 만세유전(萬歲流專)을 빌며 복장(服臧)한 옷임이 확인되었다. 색상이 보존된, 왕실의 불복장 유물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1987년 11월 23일에 중요민속자료(현, 국가민속문화유산) 제22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파계사에 소장 중이다.
영조대왕의 도포 (英祖大王의 道袍)
영조대왕의 도포는 1979년 파계사 원통전(圓通殿)의 관세음보살상을 개금(改金)하다가 발견된 18세기 대표적인 도포 유물이다. 함께 발견된 발원문과 도포 뒷길 안쪽에 부착된 한지 묵서를 통해 1740년(영조 16) 경신(庚申) 12월 11일에 영조대왕의 만세유전(萬歲流專)을 빌며 복장(服臧)한 옷임이 확인되었다. 색상이 보존된, 왕실의 불복장 유물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1987년 11월 23일에 중요민속자료(현, 국가민속문화유산) 제22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파계사에 소장 중이다.
앵삼은 젊은 생원과 진사 입격자가 방방의(放榜儀)에서 착용한 황록색 난삼이다. 난삼에서 비롯되었으나 난삼보다 밝은 색으로 제작하였다. 1747년(영조 23)부터 생 · 진사의 방방복으로 난삼과 연건을 착용하였다. 김택영(金澤榮)의 시문집 『소호당집(韶濩堂集)』에 “생원 시험이나 진사 시험에 입격한 나이 어린 사람이 황색 앵삼을 입었다.”라고 한 기록을 통해 앵삼의 용도를 알 수 있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연두색 사(紗) 겉감에 황색 사 안감을 넣고 흑색 가선을 두른 앵삼이 소장되어 있다.
앵삼 (鶯衫)
앵삼은 젊은 생원과 진사 입격자가 방방의(放榜儀)에서 착용한 황록색 난삼이다. 난삼에서 비롯되었으나 난삼보다 밝은 색으로 제작하였다. 1747년(영조 23)부터 생 · 진사의 방방복으로 난삼과 연건을 착용하였다. 김택영(金澤榮)의 시문집 『소호당집(韶濩堂集)』에 “생원 시험이나 진사 시험에 입격한 나이 어린 사람이 황색 앵삼을 입었다.”라고 한 기록을 통해 앵삼의 용도를 알 수 있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연두색 사(紗) 겉감에 황색 사 안감을 넣고 흑색 가선을 두른 앵삼이 소장되어 있다.
대구광역시 달서구 대덕산(大德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영조대사가 창건한 사찰.
대덕산 임휴사 (大德山 臨休寺)
대구광역시 달서구 대덕산(大德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영조대사가 창건한 사찰.
대구광역시 남구에 있는 고려전기 승려 영조대사가 창건한 사찰.
대구 은적사 (大邱 隱寂寺)
대구광역시 남구에 있는 고려전기 승려 영조대사가 창건한 사찰.
제민창은 조선 후기 흉년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기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설치환 환곡 창고이다. 영조 대 각 도(道)에 진휼 창고인 제민창을 설치여 곡물을 비축해 두었다가 다른 지역에 기근이 발생하면 그곳으로 곡물을 운송해 주었다. 이런 이유로 제민창은 도 경계인 경상도의 포항과 사천, 전라도의 순천과 나주, 충청도의 비인, 함경도의 덕원 등지에 설치되었다.
제민창 (濟民倉)
제민창은 조선 후기 흉년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기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설치환 환곡 창고이다. 영조 대 각 도(道)에 진휼 창고인 제민창을 설치여 곡물을 비축해 두었다가 다른 지역에 기근이 발생하면 그곳으로 곡물을 운송해 주었다. 이런 이유로 제민창은 도 경계인 경상도의 포항과 사천, 전라도의 순천과 나주, 충청도의 비인, 함경도의 덕원 등지에 설치되었다.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가 1744년 가을에 생모 숙빈최씨의 소령묘에 세우고자 짓고 쓴 묘갈문의 초고.
영조 어필 - 숙빈최씨소령묘갈문 원고 (英祖 御筆 - 淑嬪崔氏昭寧墓碣文 原稿)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가 1744년 가을에 생모 숙빈최씨의 소령묘에 세우고자 짓고 쓴 묘갈문의 초고.
조선후기 교리, 부수찬, 수찬 등을 역임한 무신.
이명환 (李明煥)
조선후기 교리, 부수찬, 수찬 등을 역임한 무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