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정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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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는 조선 후기 제23대 임금이다. 재위 기간은 1800년부터 1834년이다. 정조와 수빈박씨 사이에서 태어나 바로 원자로 호칭이 정해졌지만, 왕세자 책봉은 11세인 1800년(정조 24)에 이뤄지고 같은 날 관례를 치렀다. 왕비는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로, 순원왕후이다. 11세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1803년까지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행하였다. 1804년부터 친정하였는데, 1808년부터 1811년까지 국정을 주도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순조 (純祖)
순조는 조선 후기 제23대 임금이다. 재위 기간은 1800년부터 1834년이다. 정조와 수빈박씨 사이에서 태어나 바로 원자로 호칭이 정해졌지만, 왕세자 책봉은 11세인 1800년(정조 24)에 이뤄지고 같은 날 관례를 치렀다. 왕비는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로, 순원왕후이다. 11세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1803년까지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행하였다. 1804년부터 친정하였는데, 1808년부터 1811년까지 국정을 주도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수렴청정은 조선시대 어린 왕이 즉위하였을 때 왕실의 가장 어른인 대비(大妃)가 국정 운영에 참여하는 정치제도이다. 수렴동청정(垂簾同聽政)의 줄임말로 발을 치고 함께 정치를 듣는다는 의미이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왕의 어머니가 대신 정치를 하는 섭정(攝政)을 시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남녀 간의 내외를 엄격히 구분하여 신하들과 대비가 얼굴을 맞대고 업무를 보는 것을 예법에 어긋났다고 여겼기 때문에 발을 드리웠다. 13세에 즉위한 성종 때에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처음 시행하였으며, 모두 7회 시행되었다. 대체로 왕이 20세가 되면 철렴환정(撤簾還政)이라고 해서 물러났다.
수렴청정 (垂簾聽政)
수렴청정은 조선시대 어린 왕이 즉위하였을 때 왕실의 가장 어른인 대비(大妃)가 국정 운영에 참여하는 정치제도이다. 수렴동청정(垂簾同聽政)의 줄임말로 발을 치고 함께 정치를 듣는다는 의미이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왕의 어머니가 대신 정치를 하는 섭정(攝政)을 시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남녀 간의 내외를 엄격히 구분하여 신하들과 대비가 얼굴을 맞대고 업무를 보는 것을 예법에 어긋났다고 여겼기 때문에 발을 드리웠다. 13세에 즉위한 성종 때에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처음 시행하였으며, 모두 7회 시행되었다. 대체로 왕이 20세가 되면 철렴환정(撤簾還政)이라고 해서 물러났다.
벽파는 조선 후기, 영조대 노론 남당(南黨)의 계승자로서, 군주와 그 뜻에 순응하는 시파에 맞서 궁벽한 처지에서도 노론 의리를 고수한다고 자처하던 세력이다. 이들은 정조 대 후반에는 정조의 의리 변통 시도에 호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순조 대 초반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배경으로 과도하게 토역론(討逆論)을 관철시키다가 왕실과 노론 시파는 물론 소론 신료들의 반발을 초래하여 급속히 세력을 잃었다.
벽파 (僻派)
벽파는 조선 후기, 영조대 노론 남당(南黨)의 계승자로서, 군주와 그 뜻에 순응하는 시파에 맞서 궁벽한 처지에서도 노론 의리를 고수한다고 자처하던 세력이다. 이들은 정조 대 후반에는 정조의 의리 변통 시도에 호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순조 대 초반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배경으로 과도하게 토역론(討逆論)을 관철시키다가 왕실과 노론 시파는 물론 소론 신료들의 반발을 초래하여 급속히 세력을 잃었다.
조선 후기에, 도승지, 여주목사,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박종경 (朴宗慶)
조선 후기에, 도승지, 여주목사,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 후기에, 호조참의, 금위대장 등을 역임한 문신.
박준원 (朴準源)
조선 후기에, 호조참의, 금위대장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후기 제23대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 (純元王后)
조선후기 제23대 순조의 왕비.
김한구는 조선 후기 영조의 장인으로 영돈녕부사와 어영대장, 장악원제조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아버지로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의 작호를 받았으며, 영조 이후에는 정순왕후와 함께 정국에 영향을 미쳤다.
김한구 (金漢耉)
김한구는 조선 후기 영조의 장인으로 영돈녕부사와 어영대장, 장악원제조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아버지로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의 작호를 받았으며, 영조 이후에는 정순왕후와 함께 정국에 영향을 미쳤다.
이시수는 조선 후기 황해도관찰사,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지낸 문신이다. 정조 초년에 본격적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대사간, 한성부판윤, 병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냈다. 순조 대에는 영의정을 지냈다. 청을 다녀온 뒤에 연행 경험을 적은 「속북정시(續北征詩)」라는 장편의 시를 남겼다.
이시수 (李時秀)
이시수는 조선 후기 황해도관찰사,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지낸 문신이다. 정조 초년에 본격적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대사간, 한성부판윤, 병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냈다. 순조 대에는 영의정을 지냈다. 청을 다녀온 뒤에 연행 경험을 적은 「속북정시(續北征詩)」라는 장편의 시를 남겼다.
조선 후기에, 강원감사, 승지, 공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김구주 (金龜柱)
조선 후기에, 강원감사, 승지, 공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남양주 사릉은 조선 제6대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 여산송씨의 능이다. 단종과 함께 폐위된 정순왕후의 묘는 해주정씨 선산에 조성되었으며, 1698년 복위 뒤 왕릉의 모습으로 봉릉되었다. 사릉을 봉릉하면서 석물의 크기는 정종 후릉, 석물의 수량은 덕종 경릉을 따랐다. 사적 남양주 사릉(南楊州 思陵)으로 지정되어 있다.
남양주 사릉 (南楊州 思陵)
남양주 사릉은 조선 제6대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 여산송씨의 능이다. 단종과 함께 폐위된 정순왕후의 묘는 해주정씨 선산에 조성되었으며, 1698년 복위 뒤 왕릉의 모습으로 봉릉되었다. 사릉을 봉릉하면서 석물의 크기는 정종 후릉, 석물의 수량은 덕종 경릉을 따랐다. 사적 남양주 사릉(南楊州 思陵)으로 지정되어 있다.
원릉(元陵)은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경주김씨의 쌍릉 합장릉이다. 영조의 수릉(壽陵)은 고양 서오릉 정성왕후 홍릉에 조성되었으나, 영조 승하 후 현재의 위치에 새롭게 조성되었다. 원릉은 효종 옛 영릉의 자리에 조성되어 지대석 등 일부 돌거리는 재사용되었다. 원릉은 사적 ‘구리 동구릉’ 내에 있다.
원릉 (元陵)
원릉(元陵)은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경주김씨의 쌍릉 합장릉이다. 영조의 수릉(壽陵)은 고양 서오릉 정성왕후 홍릉에 조성되었으나, 영조 승하 후 현재의 위치에 새롭게 조성되었다. 원릉은 효종 옛 영릉의 자리에 조성되어 지대석 등 일부 돌거리는 재사용되었다. 원릉은 사적 ‘구리 동구릉’ 내에 있다.
조선 후기에, 형조참판, 성천부사, 춘천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박종보 (朴宗輔)
조선 후기에, 형조참판, 성천부사, 춘천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1844년(헌종 10) 무인 민진용 등이 일으킨 반역사건.
민진용의 옥 (閔晉鏞의 獄)
1844년(헌종 10) 무인 민진용 등이 일으킨 반역사건.
조선 후기에, 예조판서, 우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
민태혁 (閔台赫)
조선 후기에, 예조판서, 우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 후기에, 전라도관찰사, 강화유수,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원경순 (元景淳)
조선 후기에, 전라도관찰사, 강화유수,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경잠과는 1767년(영조 43), 영조의 친경례(親耕禮)와 정순왕후의 친잠례(親蠶禮)를 기념하여 시행한 과거 시험이다. 경잠과는 1767년에 단 한 번 실시되었다. 1767년 3월 11일에 시행하여 문과에서는 김문순(金文淳) 등 3명, 무과에서는 강복린(姜福麟) 등 264명을 뽑았다.
경잠과 (耕蠶科)
경잠과는 1767년(영조 43), 영조의 친경례(親耕禮)와 정순왕후의 친잠례(親蠶禮)를 기념하여 시행한 과거 시험이다. 경잠과는 1767년에 단 한 번 실시되었다. 1767년 3월 11일에 시행하여 문과에서는 김문순(金文淳) 등 3명, 무과에서는 강복린(姜福麟) 등 264명을 뽑았다.
「김천 직지사 괘불도」는 1803년에 조성된 야외의식용 불화이다.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직지사에 소장되어 있다. 사찰의 야외 의식에서 주존불의 기능을 하는 대형 불화로 조성되었다. 보관을 쓰고 두손으로 연꽃을 받쳐 들고 정면을 향해 당당하게 서 있는 독존 형식의 장엄신 괘불도이다. 19세기의 첫 장을 여는 선구적인 작품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김천 직지사 괘불도 (金泉 直指寺 掛佛圖)
「김천 직지사 괘불도」는 1803년에 조성된 야외의식용 불화이다.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직지사에 소장되어 있다. 사찰의 야외 의식에서 주존불의 기능을 하는 대형 불화로 조성되었다. 보관을 쓰고 두손으로 연꽃을 받쳐 들고 정면을 향해 당당하게 서 있는 독존 형식의 장엄신 괘불도이다. 19세기의 첫 장을 여는 선구적인 작품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