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화엄십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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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사는 전라북도 김제시 모악산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 시 명칭은 국신사(國信寺)로 화엄십찰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귀신사로 개명된 시기와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9세기 초에 귀신사로 불렸다. 고려시대에 원명국사가 중창하여 고려 말까지 번성하였다. 15세기 중후반에는 폐쇄되었으나 16세기 중반 사세를 회복하였고,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되었으나 17세기에 중창하였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대적광전과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전라북도 유형문화재인 삼층석탑, 승탑, 석수(石獸) 등의 문화재가 있다.
모악산 귀신사 (母岳山 歸信寺)
귀신사는 전라북도 김제시 모악산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 시 명칭은 국신사(國信寺)로 화엄십찰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귀신사로 개명된 시기와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9세기 초에 귀신사로 불렸다. 고려시대에 원명국사가 중창하여 고려 말까지 번성하였다. 15세기 중후반에는 폐쇄되었으나 16세기 중반 사세를 회복하였고,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되었으나 17세기에 중창하였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대적광전과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전라북도 유형문화재인 삼층석탑, 승탑, 석수(石獸) 등의 문화재가 있다.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에 있었던 『삼국유사』에 기록된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인 사찰.
태화산 비마라사 (太華山 毘摩羅寺)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에 있었던 『삼국유사』에 기록된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인 사찰.
고성옥천사일원은 신라시대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연화산 남쪽에 창건한 옥천사와 그 일대이다. 1994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신라 화엄십찰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 후기에는 어람지를 생산하는 사찰로 지정되었다. 1935년에 필사한 『옥천사사적기』에 창건과 중창에 관한 기록이 있다. 옥천사를 중심으로 청련암과 백련암, 연대암 등의 부속 암자 및 고승들의 부도, 탑비 등이 있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로 관리, 운영되고 있다.
고성 옥천사 일원 (固城玉泉寺一圓)
고성옥천사일원은 신라시대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연화산 남쪽에 창건한 옥천사와 그 일대이다. 1994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신라 화엄십찰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 후기에는 어람지를 생산하는 사찰로 지정되었다. 1935년에 필사한 『옥천사사적기』에 창건과 중창에 관한 기록이 있다. 옥천사를 중심으로 청련암과 백련암, 연대암 등의 부속 암자 및 고승들의 부도, 탑비 등이 있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로 관리, 운영되고 있다.
용천사는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비슬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승려 의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절이다. 의상이 창건한 화엄십찰의 하나인 옥천사였다고 알려져 있다. 고려 때 일연이 중수해 불일결사를 열었던 곳이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용천사대웅전과 용천사동하도로수치송공표석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관리되고 있으며, 「청도 용천사 영산회상도」는 2017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용천사 (湧泉寺)
용천사는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비슬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승려 의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절이다. 의상이 창건한 화엄십찰의 하나인 옥천사였다고 알려져 있다. 고려 때 일연이 중수해 불일결사를 열었던 곳이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용천사대웅전과 용천사동하도로수치송공표석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관리되고 있으며, 「청도 용천사 영산회상도」는 2017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옥천사는 신라시대 의상의 문도가 창건한 화엄십찰의 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사찰이다. 1784년에 내수사에 소속되어 어람지를 생산하는 사찰로 지정되었으나 지방관의 침탈이 지속되어 여러 잡역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세기에는 여러 사찰계를 통해 어려운 경제적 여건을 극복하고자 했다.
연화산 옥천사 (蓮花山 玉泉寺)
옥천사는 신라시대 의상의 문도가 창건한 화엄십찰의 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사찰이다. 1784년에 내수사에 소속되어 어람지를 생산하는 사찰로 지정되었으나 지방관의 침탈이 지속되어 여러 잡역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세기에는 여러 사찰계를 통해 어려운 경제적 여건을 극복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