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김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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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3일 북간도 용정 서전 벌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3·13반일시위운동 (三一三反日示威運動)
1919년 3월 13일 북간도 용정 서전 벌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고려독립청년당은 1944년 12월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한인 군속으로 동원된 한인 청년들의 일본군에 대한 저항 의거를 이끌었던 반일 독립운동 단체이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42년 조선군에서 포로 감시원을 모집하여 약 3,000명의 한국인 청년들을 훈련시켜 동남아 지역에 배치하였다. 한국인 군속 1,400명이 인도네시아 자바의 연합군 포로 감시에 강제 동원되었다. 한인 군속들은 일본의 패전에 대비하여 반일 단체를 조직하고 반란을 준비하였다. 1945년 1월 암바라와에서 의거하여 3일간 일본군과 접전하다가 순국하였다.
고려독립청년당 (高麗獨立靑年黨)
고려독립청년당은 1944년 12월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한인 군속으로 동원된 한인 청년들의 일본군에 대한 저항 의거를 이끌었던 반일 독립운동 단체이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42년 조선군에서 포로 감시원을 모집하여 약 3,000명의 한국인 청년들을 훈련시켜 동남아 지역에 배치하였다. 한국인 군속 1,400명이 인도네시아 자바의 연합군 포로 감시에 강제 동원되었다. 한인 군속들은 일본의 패전에 대비하여 반일 단체를 조직하고 반란을 준비하였다. 1945년 1월 암바라와에서 의거하여 3일간 일본군과 접전하다가 순국하였다.
상해거류조선인회는 1933년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친일 한인 교민 단체이다. 윤봉길의거 이후 일본이 한인들을 통제하고 일본 총영사관의 정책을 수행하는 행정 보조 기구로서 조직되었다. 주요 활동은 한인 2세에 대한 식민지 교육, 상해 지역에 대한 일제의 지배 정책 협력, 친일 인사의 포섭·확대 등이다. 이러한 활동 덕분에 일제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고 조선총독에게 감사 편지와 금일봉을 받기도 했다. 1941년까지 활동하고 상해일본인거류민단에 합병되었다. 이후 후계 단체인 계림회가 설립되었는데 이 단체는 한인들을 내선일체운동에 동원하였다.
상해거류조선인회 (上海居留朝鮮人會)
상해거류조선인회는 1933년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친일 한인 교민 단체이다. 윤봉길의거 이후 일본이 한인들을 통제하고 일본 총영사관의 정책을 수행하는 행정 보조 기구로서 조직되었다. 주요 활동은 한인 2세에 대한 식민지 교육, 상해 지역에 대한 일제의 지배 정책 협력, 친일 인사의 포섭·확대 등이다. 이러한 활동 덕분에 일제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고 조선총독에게 감사 편지와 금일봉을 받기도 했다. 1941년까지 활동하고 상해일본인거류민단에 합병되었다. 이후 후계 단체인 계림회가 설립되었는데 이 단체는 한인들을 내선일체운동에 동원하였다.
1918년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한인 교민 단체.
상해고려교민친목회 (上海高麗僑民親睦會)
1918년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한인 교민 단체.
상해대한교민단은 1919년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 설립된 한인 교민 단체이다. 1918년 상해고려교민친목회가 임시정부의 기반 조직으로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상해대한인민단으로 개칭하였다. 1920년 다시 상해대한인거류민단에 이어 상해대한교민단으로 개편되었다. 1929년 김구가 교민단장이 되면서 프랑스 조계 공동국에 청원하여 매년 보조금을 받는 등 독립운동 기관으로의 성격이 강해졌다. 거류민의 호구와 자산 조사 활동, 각종 기념식과 환영회, 강연회, 강습회, 치안유지를 위한 경찰 조직인 의경대 운영, 독립운동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34년 해체되었다.
상해대한교민단 (上海大韓僑民團)
상해대한교민단은 1919년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 설립된 한인 교민 단체이다. 1918년 상해고려교민친목회가 임시정부의 기반 조직으로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상해대한인민단으로 개칭하였다. 1920년 다시 상해대한인거류민단에 이어 상해대한교민단으로 개편되었다. 1929년 김구가 교민단장이 되면서 프랑스 조계 공동국에 청원하여 매년 보조금을 받는 등 독립운동 기관으로의 성격이 강해졌다. 거류민의 호구와 자산 조사 활동, 각종 기념식과 환영회, 강연회, 강습회, 치안유지를 위한 경찰 조직인 의경대 운영, 독립운동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34년 해체되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1940년대 전반기 중국 태항산 일대에서 대일 항전 활동을 전개했던 한인 무장 선전 조직이다. 1935년 남경에서 창설된 민족혁명당은 김원봉을 총대장으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였다. 중국 항일 전선의 변동에 따라 중국군에 배속되자 대원들은 화북으로 이동하여 조선청년연합회 회원들과 합류하였다. 1941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되어 무장 선전 활동, 적구 조직 공작, 간부 양성, 생산 활동 등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된 이후 일본군의 기습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화북, 화중 각 지구에 분산하여 활동하였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朝鮮義勇隊 華北支隊)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1940년대 전반기 중국 태항산 일대에서 대일 항전 활동을 전개했던 한인 무장 선전 조직이다. 1935년 남경에서 창설된 민족혁명당은 김원봉을 총대장으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였다. 중국 항일 전선의 변동에 따라 중국군에 배속되자 대원들은 화북으로 이동하여 조선청년연합회 회원들과 합류하였다. 1941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되어 무장 선전 활동, 적구 조직 공작, 간부 양성, 생산 활동 등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된 이후 일본군의 기습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화북, 화중 각 지구에 분산하여 활동하였다.
1941년 12월 12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2대 대원들이 중국 하북성(河北省) 호가장(胡家庄)에서 일본군의 습격에 맞서 싸운 전투.
호가장전투 (胡家庄戰鬪)
1941년 12월 12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2대 대원들이 중국 하북성(河北省) 호가장(胡家庄)에서 일본군의 습격에 맞서 싸운 전투.
화북선무단은 1945년 일제 패망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환국한 이후 외교 기구로서 설치된 대한민국임시정부주화대표단 산하 기구로 중국 화북 지방 거주 한인들의 생명, 재산 보호 및 안전 귀국을 주선했던 단체이다. 임시정부는 중국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포들을 조사·구제하기 위하여 화북·화중·화남에 선무단을 파견하여 선무 사업을 진행했다. 화북선무단은 북경에 설치되었고 단장에는 이광이 임명되었다. 교무·구호·군무의 3개 부서가 설치되어 업무를 수행하였다. 일본군으로 중국 전선에 끌려왔던 한적 사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켜 광복군을 확대한 방면에서 큰 공헌을 하였다.
화북선무단 (華北宣撫團)
화북선무단은 1945년 일제 패망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환국한 이후 외교 기구로서 설치된 대한민국임시정부주화대표단 산하 기구로 중국 화북 지방 거주 한인들의 생명, 재산 보호 및 안전 귀국을 주선했던 단체이다. 임시정부는 중국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포들을 조사·구제하기 위하여 화북·화중·화남에 선무단을 파견하여 선무 사업을 진행했다. 화북선무단은 북경에 설치되었고 단장에는 이광이 임명되었다. 교무·구호·군무의 3개 부서가 설치되어 업무를 수행하였다. 일본군으로 중국 전선에 끌려왔던 한적 사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켜 광복군을 확대한 방면에서 큰 공헌을 하였다.
화북조선독립동맹은 1942년 7월 중국 화북 태항산 지역에서 한인 사회주의자들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중심이 되어 일제 패망 때까지 활동했던 한인 독립운동 단체이다. 1941년 중국 화북 지역에서 활동하던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결성하였다가 이듬해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개편하였다. 1943년 하얼빈에서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임시정부 세력과 협동전선 구축을 모색하였으며 국내의 건국동맹과도 연대를 추진하였다. 일본 패망과 함께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북한으로 귀국한 후 조선신민당으로 개편하였다.
화북조선독립동맹 (華北朝鮮獨立同盟)
화북조선독립동맹은 1942년 7월 중국 화북 태항산 지역에서 한인 사회주의자들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중심이 되어 일제 패망 때까지 활동했던 한인 독립운동 단체이다. 1941년 중국 화북 지역에서 활동하던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결성하였다가 이듬해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개편하였다. 1943년 하얼빈에서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임시정부 세력과 협동전선 구축을 모색하였으며 국내의 건국동맹과도 연대를 추진하였다. 일본 패망과 함께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북한으로 귀국한 후 조선신민당으로 개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