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수대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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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고대사
사건
612년(영양왕 23) 7월,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에서 벌어진 주요 전투의 하나.
이칭
이칭
살수전투
사건/전쟁
발발 시기
612년(영양왕 23)
종결 시기
612년(영양왕 23)
발발 장소
살수(지금의 평안북도 청천강)
관련 국가
고구려|수나라
관련 인물
을지문덕|수 양제|우중문|우문술
내용 요약

살수대첩(薩水大捷)은 612년(영양왕 23) 7월,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에서 벌어진 주요 전투의 하나이다. 612년 7월 24일에 을지문덕이 지휘한 고구려군이 우중문과 우문술 등이 지휘한 수나라군을 살수에서 크게 격파한 전투였다.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이다.

목차
정의
612년(영양왕 23) 7월,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에서 벌어진 주요 전투의 하나.
내용

612년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에서 전개된 주요 전투의 하나이다. 고구려 측의 지휘관은 을지문덕(乙支文德)이었고, 수나라 측의 지휘관은 우중문(于仲文)과 우문술(宇文述) 등이었다. 612년 7월 살수(薩水)에서 전투하였는데,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淸川江)이다.

612년 수나라의 양제(煬帝)는 113만의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육군은 40개의 부대로 편성하였는데, 각 부대를 군(軍)이라고 하였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은 40개의 군 중에서 9군을 지휘하였다. 9군의 병력 수는 30만 5천 명이었다.

우중문과 우문술의 9군은 노하진(潞河鎭)과 회원진(懷遠鎭)에서 출진하였다. 노하진과 회원진은 랴오허강〔遼河江〕 서쪽에 설치된 수나라의 군사 거점이었다. 처음 그들의 집결지는 압록강 서쪽이었다. 출발할 때 인마(人馬) 모두 100일치의 식량을 지급받았다고 한다.

별도의 군수 보급 없이 압록강 서쪽까지 빠른 속도로 행군하도록 한 것이다. 압록강 서쪽에 먼저 집결해서 강을 건널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이후 양제가 이끄는 수나라 주력부대가 도착하면 합류해 남쪽으로 나아갈 계획이었다고 보인다.

612년 전쟁에서 고구려와 수나라의 군대가 본격적으로 충돌한 것은 3월부터였다. 랴오허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는 수나라 군대의 도하를 저지하며 방어에 나섰던 것이다. 수나라 군대가 도하에 성공한 것은 4월 중순이었다. 이때부터 요동성을 비롯한 요동 지역 고구려의 여러 성은 수성전(守城戰)을 전개하였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도 4월 중순 이후 랴오허강을 건넜다고 파악된다.

우중문이 이끈 부대의 경우 오골성(烏骨城), 즉 지금의 랴오닝성〔遼寧省〕 봉황산성(鳳凰山城)을 경유하였다고 한다. 9군의 이동경로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수 있는데, 대체로 랴오허강을 건너 압록강 하구 방면으로 이동하였고, 서안에 집결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6월 중순까지 랴오닝성을 비롯한 고구려의 성은 건재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된 것이다. 이에 따라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은 식량 부족에 직면하였다. 9군은 처음 노하진과 회원진에서 출발할 때 100일치의 식량뿐만 아니라 무기와 각종 군수물자를 보급받았는데, 병사마다 3섬 이상의 무게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동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식량을 버리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장수와 병졸 모두 장막 아래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때 이미 식량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이때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을 상대한 것이 고구려의 을지문덕이었다.

을지문덕은 압록강을 건너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군영으로 갔다. 거짓으로 항복하면서 그들의 실상을 살펴본 것이다. 다시 압록강을 건너 돌아온 을지문덕은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우중문은 기병을 선발해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는데, 을지문덕은 싸울 때마다 거짓으로 패배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시를 보냈다고 한다. “신묘한 계책은 천문을 꿰뚫었고, 기묘한 계책은 지리를 통달해 알았네. 싸워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할 줄 알면 멈추길 바라노라[神䇿究天文, 妙筭窮地理. 戰勝功旣髙. 知足願云止].”

우중문은 편지를 보내 회유하였지만 을지문덕은 거절하였다. 을지문덕은 압록강 동쪽에 설치한 울타리를 불태우고 도망쳤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을 유인하고자 한 것이다. 우문술은 양식이 부족하므로 회군하고자 하였지만, 우중문은 추격해 전공을 세우고자 하였다고 한다.

둘 중에 양제에게 보다 큰 권한을 위임받은 우중문의 견해가 채택되었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은 압록강을 건너 평양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지점까지 왔다. 산에 의지해서 군영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우중문 등은 내호아(來護兒)의 수군(水軍)과 합류할 계획이었다고 보인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내호아는 대규모의 선단을 이끌고 동래(東萊), 즉 지금의 중국 산둥성〔山東省〕 지역에서 바다를 건너 대동강 입구까지 왔다. 그리고 평양성에서 60리 떨어진 포구에서 주둔하였다. 내호아 수군의 주된 역할은 식량 운송이었다. 우중문 등은 내호아의 부대로부터 식량을 보급받으면 평양성 공격에 나설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내호아의 부대는 포구에서 고립된 처지였다. 고구려군의 거짓 패배에 자신감을 얻어 자신의 부대만으로 평양성 공격에 나섰다가 대패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은 내호아의 수군(水軍)에 합류할 수 없었다. 식량 부족에 따른 압박은 가중되었다.

이러한 때 을지문덕은 다시 사신을 파견해 거짓으로 항복하였다. 회군한다면 영양왕을 모시고 가서 수 양제에게 조회하고 알연하겠다고 한 것이다. 우중문과 우문술 측에 회군할 명분을 제공한 것이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은 결국 회군을 결정하였다.

그러자 고구려군은 곧 그들을 추격하였다. 9군의 지휘관 중의 하나였던 설세웅(薛世雄)은 평양성에서 퇴각하면서 백석산(白石山)까지 왔는데, 고구려군에게 겹겹이 포위되었고 사면에서 화살 공격을 받았다고 하였다. 간신히 탈출하였지만 잃은 병력이 많았다고 한다.

고구려군이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전투는 살수에서 전개되었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은 7월 24일 살수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고구려군은 그들이 살수를 반 정도 건넜을 때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뒤에서부터 후군(後軍)을 공격하였다. 수나라 장군 신세웅(辛世雄)을 전사시켰다. 수나라의 여러 부대를 모두 무너뜨리고 마비시켰다.

수나라 여러 부대의 장수와 사졸은 달아나 도망치기 급급하였다. 만 하루 만에 압록강까지 도망쳤다고 하였다. 살아서 랴오닝성에 귀환한 자가 불과 2천7백 명이었다고 한다. 고구려의 대승이었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이 퇴각하자 포구에 고립되어 있던 내호아의 부대 역시 퇴각하였다. 수 양제 역시 9군의 패배를 보고받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수전투의 큰 승리로 612년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이 종결된 것이다. 살수대첩은 612년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의 결정적 전투였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수서(隋書)』
『자치통감(資治通鑑)』
『책부원귀(冊府元龜)』

단행본

이정빈, 『고구려 · 수 전쟁-변경 요서에서 시작된 동아시아 大戰-』(주류성, 2018)
임용한, 『한국고대전쟁사2』(혜안, 2012)
육군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2』(육군본부, 2012)
강성문, 『한국 군사사의 재조명』(황금알, 2005)
임용한, 『전쟁과 역사-삼국편-』(혜안, 2001)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사계절, 1999)
서인한, 『고구려 대수·대당 전쟁사』(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 1991)

논문

정동민, 「고구려와 수 전쟁 연구」(한국외국어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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