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술은 일제강점기 경성반제동맹 사건, 조선공산당재건운동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운동가이다. 1902년 경남 울산 출생으로 일본 동경고등사법학교 유학 시 사회주의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34년 ‘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을 결성하고 학생운동부문을 담당하였으며, 1939년 ‘경섬콤그룹’의 초기 지도부를 작성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중앙위원 및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7월 미군정 경찰에 검거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고,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전교도소에서 처형되었다.
1902년 경상남도 울산 출생으로, 이명(異名)은 이수해(李樹海), 김종석(金鍾石), 김대성(金大成)이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마친 후, 1925년 3월 경성의 중동학교(中東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해 1929년 3월 동경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 지리역사과를 졸업했다. 고등사범학교 재학 중 법제경제연구회에서 활동하면서 사회주의에 대해 공부했다.
귀국 후 1929년 4월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되었고, 1931년 학생자치 및 교내 경찰출입 반대 등을 내건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지도했다. 1932년 10월 재학생과 졸업생으로 구성된 독서회를 지도했으며, 11월 ‘반제동맹 경성지방결성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1933년 1월 ‘경성반제동맹 사건’으로 검거되었고, 1934년 3월 31일 병보석으로 가출옥 했는데, 그해 12월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무렵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인 박선숙(朴璇淑)과 결혼했다.
가출옥 상태였던 1934년 9월부터 경성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지도하던 이재유(李載裕)와 함께 활동을 시작하여, 12월 ‘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을 결성하고 학생운동부문을 담당했다. 1935년 1월부터 이 그룹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자, 2월 이재유와 함께 수해이재민 형제로 가장해 경기도 양주에 비밀 생활근거지를 마련했다.
1936년 5월 김희성(金熙星) 등의 콤그룹과 통일을 추진했으나 실패했고, 10월 이재유 등과 함게 경성트로이카와 경성재건그룹의 통일체인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을 결성하고 출판부 책임자로서 기관지 『적기(赤旗)』를 발간했다. 그해 12월 이재유가 검거되자, 행상(行商)을 가장하고 피신해 다녔다.
1937년 7월 새로 출옥한 동지들과 함께 그룹 재건을 추진했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무산되었다. 이후 대전 · 대구 등지에서 신분을 위장하고 다니면서 계속 활동을 모색했다.
1939년 1월경 경성으로 올라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인 여동생 이순금(李順今), 김삼룡(金三龍) 등과 함께 활동을 재개하여 4월경 ‘경성콤그룹’의 초기 지도부를 구성했다. 「노동자 리플렛」, 「메이데이 투쟁방침서」 등을 제작 · 배포했으며, 기관지 출판 책임자로서 9월부터 기관지 『코뮤니스트』를 월간으로 발간했다.
1940년 2월 인천에 편집아지트를 마련하고 출옥한 박헌영(朴憲永)을 피신시켰다. 그해 8월 함북노동조합조직준비위원회 지도자 장순명(張順明) 등과 함북노조준비위원회를 청진좌익노조조직준비위원회로 개편하고, 기관지 출판과 편집 책임자가 되었다.
1941년 1월 검거되었다가, 1943년경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지하활동을 계속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1945년 해방 이후 박헌영을 중심으로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중앙위원 및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으로 활동했다. 그해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설립된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곧이어 9월 14일 조선인민공화국 선전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민족통일전선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이 되었다. 그해 7월 6일 ‘조선정판사위폐사건(朝鮮精版社僞幣事件)’으로 미군정 경찰에 검거되어, 11월 28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중이던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