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건국준비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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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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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과 함께 조직된 최초의 건국준비단체. 약칭 ‘건준(建準)’.
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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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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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45년 해방과 함께 조직된 최초의 건국준비단체. 약칭 ‘건준(建準)’.
내용

1945년 8월 초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배가 유력해지자 당시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일본의 항복과 더불어 일어날지 모를 조선에 있는 일본인들의 안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의 민족지도자와 협력관계를 맺고자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隆作]를 앞세워 협상대상자를 찾았다.

민족지도자 중에서 여운형(呂運亨)은 총독부 제안을 받아들이고, 8월 15일 오전 8시 엔도와 만나 일본측이 요구한 자주적 국내치안유지와 일본인들의 안전한 귀환을 보장하고, ① 정치·경제범의 즉시 석방, ② 3개월간의 식량 보급, ③ 치안유지와 건국사업에 대한 간섭 배제, ④ 학생훈련과 청년조직에 대한 간섭 배제, ⑤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사업에 조직, 동원하는 것에 대한 간섭 배제 등을 조건으로 협상을 타결하였다.

여운형은 일본의 항복과 동시에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발족시켰고, 8월 16일 오후 1시 서울의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엔도와의 회담경과 보고연설회를 개최하였다.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安在鴻)은 한·일 두 민족의 자주호양을 요망하는 담화를 방송하면서, 경위대 편성을 넘어 정규병의 무장대를 편성하여 질서를 도모할 것과, 식량정책을 넘어 경제상 통화와 물가에 대한 신정책을 수립하고 근본적인 정치운영 대책을 발표하겠다고 하였다. 이들은 서울 풍문여자중학교에 사무소를 두고 건국준비사업 선전공작과 치안활동을 개시하였다.

8월 17일에는 건준의 중앙조직이 발표되었는데, 여운형이 위원장이 되고, 부위원장 안재홍, 그 외 5개부서로 총무부장 최근우(崔謹愚), 재무부장 이규갑(李奎甲), 조직부장 정백(鄭栢), 선전부장 조동호(趙東祜), 무경부장(武警部長) 권태석(權泰錫)으로 진용을 갖추었다.

8월 18일에는 여운형이 제1차 위원회를 개최, 건준 명의로 ‘3천만 동포에게 지령’을 발표하였다. 자치기관을 신속하게 조직하고, 조직이 완료되면 건준에게 연락하며, 건국준위원회 공작에 협력할 것을 지시하였다. 즉, ① 어느 기간까지 자발적으로 자치수단을 강구하여야 한다. ② 자치수단은 가장 신속하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하여야 된다. ③ 자치수단은 어디까지나 평화적이어야 한다. ④ 모든 공사기관의 기능을 확보하기 위하여 소속인원은 현 직장을 엄수하여야 한다. ⑤ 각 원은 각기 직장에서 적극적으로 위원회의 공작에 협력하여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하지만 민족주의계열 일부 및 공산주의 계열 내부에서 건준의 조직상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8월 18일 김병로, 백관수, 이인 등은 민족주의계열과 건준 합작을 위해 여운형 안재홍과 담판을 제의하였고, 이들 간에 19일 ‘전국유지자대회’를 소집하기로 합의하였으나 그날 밤 여운형이 해방 후 최초의 테러를 당하면서 이는 실행되지 않았다. 또한 테러로 여운형이 공석인 상황에서 21일 고경흠(高景欽), 윤형식, 정백 등 소위 장안파 공산주의 계열에서 상의 없이 건준 경성지회를 휘문중학교 강당에서 조직하고 15명의 위원을 선출하여 이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8월 22일에 건준 2차 중앙조직이 구성되었다. 여운형, 최근우, 이동화(李東華), 이병학(李丙學), 이여성(李如星), 이상도(李相燾), 장권(張權), 권태석, 권태휘(權泰彙), 김약수(金若水), 박문규(朴文奎), 이강국(李康國), 최용달(崔容達), 이광(李光), 정의식, 정화준(鄭和濬), 김교영, 홍기문(洪起文), 고경흠, 윤행식, 최성환, 최익한(崔益翰), 정백, 안재홍, 양재하(梁在廈), 이승복(李昇馥), 이의식, 유석현(劉錫鉉), 이규갑, 김준연(金俊淵), 함상훈(咸尙勳), 이용설(李容卨), 정순용 등 총 33명으로 확대되었다.

중앙조직이 발표된 다음 날부터 좌우협상 및 건준 확대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8월 23일 선전부장 권태석은 백관수를 만나 좌우를 아우른 건준 확대위원을 논의하였고, 여운형은 건준이 신국가 권력을 독점하려는 행위라는 민족주의계열의 비판을 겨냥해 건준은 신정권이 수립될 때까지의 준비와 치안 확보를 위한 것이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25일에 권태석은 다시 김병로, 백관수, 이인, 박명환, 김용무, 박찬희, 김약수 등과 만나 확대위원 명단을 합의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위원장 직무대리인 안재홍이 직권으로 5명의 우익인사를 추가하고 건준 내부에서 좌익적인 소장파 백여명을 추가하는 등의 문제로 좌우간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러한 중앙집행부 내부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건준은 8월말까지 전국적인 조직을 완료한다는 목표를 위해 지역 조직을 구성하였다. 8월 26일 위원회의 기획부 전조선직역자치본부(全朝鮮職域自治本部)에서는 각 지역 종업원들에게 지역별 자치회의 조직을 통고하고, 또 각 지방에는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무경부 산하에는 장근(張槿)을 대장으로 하는 치안대가 조직되어 사무국장에 정상윤(丁相允), 총무부장에 송병무(宋秉武) 등이 17개 부서를 맡게 되었다.

9월 2일 서기국을 통해 발표된 강령을 보면 ①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②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을 기함, ③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 등의 3개 항을 내세웠다.

그러나 건준과 민족주의계열의 협상이 결렬된 상황에서 8월 31일 여운형은 사직을 선언하고, 안재홍도 건준에 사표를 제출했다.

건준은 9월 1일 사회주의계열 인사 중심으로 135명의 확대위원 명단을 발표하였다. 9월 4일에는 확대위원회가 열렸으나 135명 중 일부만이 참석한 가운데 여운형과 안재홍의 사임수리 건을 18대 17로 부결시키고, 허헌(許憲)을 부위원장으로 추가하였다. 한 증언에 따르면 같은 날 허헌, 박헌영, 여운형, 정백 등 4인이 회동하여 인민공화국 수립문제와 구성을 협의했다. 이틀 후인 9월 6일 위원회는 600여 명으로 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서울 경기여자중학교 강당에서 소집하였다.

이 회의는 헌법기초위원을 겸직하는 전국인민대표위원에 이승만(李承晩)·여운영·허헌·김규식(金奎植)·김구(金九)·김성수·김병로·안재홍·이강국·신익희(申翼熙)·조만식(曺晩植) 등 55명을, 고문에 오세창(吳世昌)·권동진(權東鎭)·김창숙(金昌淑)·이시영(李始榮) 등 12명을 각각 선출하고, 「조선인민공화국임시조직법」을 통과시킨 다음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발표하였다.

따라서 건국준비위원회는 9월 7일 해체되었고, 9월 11일,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는 여운형, 총리에는 허헌이 각각 추대, 임명되었으며, 9월 14일 인공중앙위원회에서 인공의 정부 부서 및 정강, 시정 방침 등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여운형은 9월 7일 2차 테러를 당하였고, 상해임시정부의 환국을 기다리던 송진우·김성수·장덕수 등은 임정봉대론을 주장하며 이들 조각을 인정하지 않았고, 미군정은 10월 10일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환국한 이승만도 주석 취임을 거절하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자연적으로 해체되었다.

참고문헌

『해방삼십년사』1 (송남헌, 성문각, 1976)
『자료대한민국사』1 (국사편찬위원회, 1968)
『몽양여운형』(여운홍, 청하각, 1967)
『여운형선생투쟁사』(이만규, 민주문화사, 1946)
「8·15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적 한계와 좌·우 분립의 배경」(윤덕영,『사학연구』100, 2010)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과 통일국가의 모색」(이규태『한국근현대사연구』36, 2006
『매일신보』(1945.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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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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