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藏所)의 싸움이라고도 한다. 1592년 4월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5월 초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북침을 계속하였고, 그해 6월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함경도 지역에 침입하였다.
마천령을 넘어 해정창에 쳐들어오자 함경북도병마절도사 한극함은 육진(六鎭)의 군대와 함경남도병마절도사 이영(李瑛)의 군사를 합쳐 도합 1,000여 명을 거느리고 일본군을 맞아 싸웠다. 처음에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는 북도병(北道兵)의 선전(善戰)으로 일본군을 물리치는 듯하였으나 북병사의 성급한 전투진행으로 도리어 그들의 작전에 말려들어 패전하고 부령부사(富寧府使) 원희(元喜)가 전사하였다.
한극함은 군사를 거두어 재 위에 진을 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다시 싸우려 하였으나 짙은 안개를 이용한 일본군의 기습으로 다시 패하였다. 한극함 등은 겨우 몸만 빠져나가 종성을 지키려 하였으나 또 실패하였다.
이 싸움이 있은 지 5일 후에 일본군에게 회령을 점령당하자 반민(叛民) 국경인(鞠景仁)에 의하여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이 결박되어 가토 기요마사의 진영에 넘겨졌다. 해정창은 성진시(城津市)로 비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