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미황사 대웅전은 전라남도 해남군 미황사에 있는 조선 후기에 중창된 사찰 건물이다. 198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미황사는 달마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며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다. 「달마산미황사대법당중수상량문」(1754년)에 3차에 걸친 미황사 중창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대웅전은 미황사의 3차 중창이 끝난 후 다시 지은 건물이다. 절의 대웅전은 주불전으로 내부에 석가모니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 형태이다. 미황사 대웅전은 18세기 이후 불전의 전형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사적기(事蹟記)에 749년( 경덕왕 8) 의조화상(義照和尙)이 미황사를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 후기에는 그 이름이 중국에 알려질 정도로 번성하였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도 사세를 유지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미황사는 3차례에 걸친 중창불사를 통해 많은 건물들을 세웠으나, 19세기 중반부터 쇠락하면서 대웅전과 응진당(보물, 1993년 지정)을 비롯하여 몇 동의 건물만 남게 되었다. 1991년 이후부터 최근까지 여러 건물들을 신축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대웅전은 미황사의 1차 중창 때인 1601년에 재건되었고, 1660년에 2차 중창되었다. 1727년(영조 3)에는 괘불을 조성하여 대웅전에 봉안하였다. 지금의 대웅전은 미황사의 3차 중창이 끝난 1754년(영조 30)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1822년(순조 22)에 중수하면서 단청을 새로 하고 삼존불상의 금칠도 다시 하였다. 이후에도 몇 차례 수리가 있었으며, 1981년부터 이듬해까지 대웅전을 해체 수리하면서 창호와 지붕부를 일부 변경하였다.
미황사는 경사지에 여러 단의 축대를 조성하여 건물들을 배치하였다. 미황사의 중심영역은 마당을 중심으로 뒤쪽에 축대를 쌓아 대웅전을 세웠고, 마당의 좌우에는 세심당과 향적전이 자리한다. 대웅전 옆에는 명부전이 대웅전을 향해 서 있고, 대웅전의 맞은편에는 자하문이 마당보다 2단 낮은 곳에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 영역은 마당이 넓고 시야가 시원하게 열려 있어 개방적인 느낌을 준다. 대웅전 뒤쪽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달마산의 기암괴석은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릴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으로 서향하고 있다. 기단은 축대를 그대로 활용하였으며 초석은 자연석과 문양이 있는 가공초석을 함께 사용하였다. 기둥은 원기둥으로 약간의 민흘림이 있다.
공포는 외3출목, 내4출목 구조이다. 정면과 배면은 매 칸마다 2조의 주간포(柱間包)를 배열하였고 양 측면은 매 칸마다 1조의 주간포를 놓았다. 첨차는 하단을 둥글게 깎은 교두형(翹頭形)이다. 1∼4단 제공은 바깥쪽 하부에 모두 연봉을 조각하였는데 1·2·3제공은 바깥 끝이 하늘로 향하는 앙서형(仰舌形)이며 4제공은 익공형(翼工形)이다. 보머리와 주간포의 5제공은 봉두(鳳頭)로 꾸몄다. 내부에서는 1∼4단 제공을 일체형으로 초각하였고, 5·6·7단 제공은 각각 연꽃 · 연봉 · 봉두로 조각하여 장식성을 높였다. 한편 배면 어칸에 사용된 공포는 모습이 다르다. 1∼3단 제공은 교두형이고, 주상포의 4제공은 익공으로 하부에 연봉을 조각하였으며, 보머리와 주간포의 4·5단 제공은 운공형(雲工形)이다. 이러한 공포의 모습은 1597년 건립된 응진당에서도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1660년 중창 때 만든 것을 1754년 중창 때 재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가구구조(架構構造)는 1고주 5량 형식이나 실제로는 5량 구조에 가깝다. 일반적으로 고주는 평기둥보다 지름이 큰 것을 사용하고 종보를 받치지만 미황사 대웅전은 고주가 평기둥보다 지름이 훨씬 작고 대들보와 툇보를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고주는 불단 앞 예불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측면 기둥열에서 뒤쪽으로 물려 세웠다. 대들보와 툇보는 마치 한 부재처럼 사용되어 있는데 연결되는 지점에 고주가 받치고 있다. 대들보 위에는 화반대공을 십(十)자로 짜서 종보와 종도리를 결구하였고, 종보 위에는 동자주를 세워 종도리를 받쳤다. 충량은 4개가 사용되었는데 대들보 위에 걸치는 부분은 직절(直切)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처마는 서까래와 부연을 사용한 겹처마이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인 우물천장인데, 중도리 바깥쪽은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빗천장은 일반적으로 널판을 사용하지만 미황사 대웅전은 빗천장도 귀틀과 반자를 모두 갖춘 우물천장으로 처리하여 내부의 격조를 한 층 높였다. 또한 불상이 모셔진 가운데 부분은 소란을 갖춘 우물천장으로 구성하여 위계가 높음을 강조하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사자상, 극락조, 불단 위의 위패, 정(丁)자 모양의 닫집이 있어 한층 장식적이다.
미황사 대웅전은 공포에 사용된 제공의 형태와 정면 어칸의 용두 등이 1765년 세워진 불국사 대웅전과 매우 유사하다. 미황사 대웅전 중창공사에 참여한 상편수 쾌행(快行)은 1781년 불국사 자하문(紫霞門)을 건립할 때 우편수로 참여하였고, 1785∼1786년 기림사(祗林寺) 대적광전(大寂光殿)을 개조 중수할 때 도편수를 역임한 인물이다.
구조적인 특징은 대들보와 툇보를 맞보 형식으로 걸고 하부에 고주를 세워 받친 것과 서까래의 구성 방식을 들 수 있다. 서까래는 중도리와 외목도리 사이에 긴 서까래를 걸었고, 중도리 위에 다시 덧도리를 올리고 짧은 서까래를 올렸다. 이러한 구조는 지붕부의 무게를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일부 서까래에서는 끝부분을 타원형으로 치목하는 옛 수법도 보인다. 특히 연꽃, 거북, 게 등 특이한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는 가공초석은 다른 건물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초석들은 바닷가 근처의 민간신앙을 수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미황사 대웅전은 1754년 세워진 불전으로서 평면의 구성, 공포의 장식성과 내출목이 외출목보다 많은 것, 화려한 단청, 우수한 조각 수법 등에서 18세기 이후 불전의 전형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배면 어칸에는 1660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공포가 그대로 남아 있어 공포의 시기별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