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동 ()

대중음악
인물
일제강점기 「물방아 사랑」 · 「안개 낀 상해 」 · 「서귀포 칠십리」 등을 만든 작곡가.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박시춘(朴是春)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3년 10월 28일
사망 연도
1996년 6월 30일
출생지
경상남도 밀양
정의
일제강점기 「물방아 사랑」 · 「안개 낀 상해 」 · 「서귀포 칠십리」 등을 만든 작곡가. 친일반민족행위자.
생애 및 활동사항

1913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출생했다. 부친이 밀양에서 기생을 양성하는 권번(卷番)을 운영하여 유년시절 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 등과 같은 당대 명창의 창(唱)과 판소리에 쉽게 접했다고 한다. 밀양보통학교를 다녔으나 중병에 걸린 부친의 치료에 가세가 기울어 중퇴하고, 12세 무렵 가출하여 공연단체나 영화순회 공연단에 끼어 만주·일본 지역으로 떠돌았다. 당시 영사기술을 익혀 전라남도 여수항의 영화관에서 3년간 영사기사로 일했으며, 일본연예단을 따라 갔다가 오사카[大阪]의 덴만구락부[天滿俱樂部]에서 악사로 일하면서 기타 음악에 몰입했다.

1930년대 중반 경성에서 조직된 '아리랑 가무단'에 참여했고, 이때 홍개명(洪開明)이 예명으로 박시춘을 지어주었다. 1935년 홍개명이 작사한 「희망의 노래」 작곡을 시작으로 작곡가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시에론(Chieron)·럭키(Lucky)·태평(太平)레코드사 등을 비롯, 주로 오케(Okeh)레코드사의 전속작곡가로 다수의 곡들을 발표했다. 1937년 김정구(金貞九)가 처음 올 취입한 「항구의 선술집」, 남인수(南仁樹) 노래의 「물방아 사랑」을 비롯하여, 1938년 커다란 인기를 얻은 「애수의 소야곡」(이부풍(李扶風) 작사)과 '치안 방해'를 이유로 가두연주가 금지된 「기로의 황혼」 등을 발표했다. 이후 1939년 「감격시대」·「안개 낀 상해 」, 1940년 「선부의 아내」·「눈 오는 네온가」, 1941년 「무정천리」·「집없는 천사」, 1942년 「목단강 편지」·「내 고향」, 1943년 「황포돛대」·「서귀포 칠십리」 등 약 270곡 이상을 발표한 것이 확인된다. 작곡 이외에도 조선악극단(朝鮮樂劇團: 오케레코드사 소속)·약초(若草)가극단 등 다수의 공연에도 참여했고, 1939년부터 『박시춘 기타 작곡집』(총 3권, 동인(同人) 출판사)를 간행했다.

한편 10여곡의 친일 군국가요를 작곡했는데, 1942년 「고성(古城)의 달」(최병호(崔丙浩) 노래), 「남쪽의 달밤」·「낭자일기(娘子日記)」(남인수 노래), 「아들의 혈서」·「즐거운 상처」(백년설(白年雪) 노래), 「아세아의 합창」(김정구 노래), 「진두(陣頭)의 남편」(박향림(朴響林) 노래)를 비롯, 1943년 「결사대의 아내」·「옥통소 우는 밤」(이화자(李花子) 노래), 「조선해협」(백년설 노래), 「지원병의 집」(남인수·박향림·백년설 노래) 등이다. 이 곡들은 모두 조명암(趙鳴岩)이 작사했다. 특히 「조선해협」은 조선인에게 지원병 제도를 선전하기 위해, 같은해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서 제작한 동명의 영화 「조선해협」(박기채(朴基采) 감독)의 주제가였고, 「혈서지원」은 '조선징병제' 실시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외에도 1943년 매일신보사 주최, 국민총력 조선광산연맹 후원 하에 조선연예문화협회가 연예 부문을 담당하여 전국 주요 공장과 광산 위문공연을 위해 조직된 산업전사격려위문예능대(朝鮮産業戰士激勵慰問藝能隊)의 대원으로 참가했다. 1944년에는 조선인들의 일본군 지원을 선전하기 위해 조선군보도부(朝鮮軍報道部)에서 제작한 영화 「헤이타이상[兵隊さん : 병정님]」의 내용을 악극화한 「헤이타이상」의 음악을 담당했다. 또한 '미영격멸(美英擊滅) 의식 고취를 위해 연극인들의 역량을 총집결한 예능제(藝能祭)'였던 「성난 아시아[怒のり亞細亞]」의 작·편곡을 담당했다.

해방 이후 음반 생산이 재개되는 1947년 중반까지는 주로 악단에서 활동했다. 1946년 자신이 조직한 '박시춘 악단'을 비롯하여 케이피케이(K.P.K), 제일선(第一線)·은방울악극단·빅타가극단 등의 공연에 참여했고, 1947년 조직된 서울중앙방송국 경음단의 지휘를 맡았다. 이후 음반 생산이 이루어지자 1948년 조국 분단의 아픔을 노래한 「가거라 삼팔선」(이부풍 작사, 남인수 노래)를 시작으로, 1949년 「낭랑 십팔세」·「신라의 달밤」(현인(玄仁) 노래)·「럭키 서울」·「비 내리는 고모령」·「고향만리」, 1950년 「애정산맥」 등과 같은 다수의 인기곡들을 작곡했다.

6·25 전쟁 당시 9·28 서울수복 이후 국방부 정훈국(政訓局) 문예중대 제2소대 '가협(歌協)'에 종군하며 위문공연을 했고, 전후방에서 애창된 「전우야 잘자라」·「승리의 용사」 등의 '진중(陣中)가요'를 작곡했다. 이외에도 1951년 「님 계신 전선」, 1952년 「전선야곡」, 1953년 「굳세어라 금순아」·「샌프란시스코」, 1954년 「봄날은 간다」·「이별의 부산정거장」등을 비롯하여 1970년 「일자상서」 등 계속해서 수많은 인기곡을 발표했다. 1950년대 중반에는 노벨(Nobel)레코드사 및 오향(五響)영화사를 설립해 운영하면서, 영화와 영화음악 제작에 참여했다. 특히 1958년 「삼등 호텔」·「딸 칠형제」는 직접 감독을 맡기도 했다. 1961년부터 한국연예협회 초대·제4~7대 회장을 지냈고, 1966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1996년 6월 30일 사망했다.

박순동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384∼404)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상훈과 추모

문화훈장 보관장(1982)을 받았다.

참고문헌

『한겨레음악인대사전』(송방송, 보고사, 2012)
『한국 가요사 1·2』(박찬호, 미지북스, 200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유성기음반총람자료집』(2008)
「일제시대 음반검열 연구」(이준희, 『한국문화』 39, 2007.6)
『한국연예대감』(1962)
『신시대(新時代)』(제4권 제11호, 1944.11)
『조광(朝光)』(제4권 제11호, 1938.11)
『동아일보(東亞日報)』
『매일신보(每日新報)』
집필자
심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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