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울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은을암(隱乙巖)·망부석(望夫石)·치산서원지(鵄山書院址) 등 3개소 걸쳐 분포하고 있는 유적이다.
원래 이들 3곳의 유적은 효충사와 함께 1988년 12월 23일 경상남도 기념물로 일괄 지정되었었다. 그 뒤 1997년 7월 15일울주군이 울산광역시에 편입되면서 울주군 내의 이들 유적지는 같은 해 10월 9일 울산광역시 기념물로 다시 지정되었다.
① 은을암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척과리의 국수봉(菊秀峰)에 있는 바위로, 박제상의 부인인 치술신모(鵄述神母)와 관련있는 유적이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신라 눌지왕 2년(418)에 박제상이 일본에 볼모로 가 있던 미사흔을 구출한 뒤 왜인에게 잡혀 처참하게 죽자, 부인 김씨는 남편을 사모하는 정을 잊지 못해 딸 둘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으니 몸은 돌로 변해 망부석이 되고 혼은 새가 되어 바위 구멍으로 들어가 숨었다고 한다. 뒤에 사람들이 이 새가 숨은 바위를 은을암이라 하였다.
② 망부석은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에 있는 바위로, 박제상의 부인 치술신모와 관련되어 있다. 구전에 의하면, 신라 눌지왕대에 고구려로부터 복호를 구출하고 돌아온 박제상이 곧바로 왜국에 있는 미사흔을 구출하기 위해 율포(栗浦)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나자 이 일을 알게 된 박제상의 부인은 율포로 갔으나 박제상은 이미 배를 타고 떠나며 손을 흔들 뿐이었다.
왜국에 간 박제상은 미사흔을 무사히 신라로 보내고 자기는 왜인의 손에 죽었다.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누지 못해 두 딸과 함께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죽어 몸은 돌로 변해 망부석이 되고 혼은 새가 되어 은을암에 숨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망부석의 좌우에 작은 바위 두 개가 서 있는데 이것은 두 딸이 죽어 돌이 된 것이라 한다.
③ 치산서원지는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의 마을 어구에 있던 치산서원의 옛터이다. 치산서원은 1745년(영조 21)에 신라 충신 박제상과 그의 부인 금교부인(金校夫人) 및 두 딸의 충혼(忠魂)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서원 안에는 박제상을 모신 충렬묘(忠烈廟)와 금교부인을 모신 신모사(神母祠), 그리고 두 딸을 모신 쌍정려(雙旌閭)가 있었으나 조선 고종대 서원철폐령으로 모두 없어지고 현재는 충렬묘·신모사의 옛 자리만 남아 있다.
충렬묘는 치산서원지의 가장 안쪽 되는 곳, 즉 낮은 산봉우리 바로 밑에 있었는데, 현재 건물은 없어지고 높이 1m, 길이 14m의 남향 건물지만 남아 있다.
건물지의 중앙에 박제상의 위패를 묻어 모셨다는 직경 2.2m, 높이 20㎝의 낮은 봉토가 있다. 한편 신모사지는 충렬묘의 동남쪽 옆에 있는데, 대지는 10.7m ×5.8m 규모이다. 신모사지 중앙에도 금교부인의 위패를 묻어 모셨다는 낮은 봉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