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보부인 ()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에 왕의 유모(乳母)에게 내린 외명부 종1품의 작호(爵號).
내용 요약

봉보부인은 조선시대에 왕의 유모에게 내린 외명부 종1품의 작호(爵號)이다. 왕자나 왕녀에게 젖을 먹이는 유모 가운데, 왕자가 왕이 되면 책봉되었다. 내외법 등으로 양반가에서 유모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대부분 천민 출신이었다. 왕자가 3살이 될 즈음까지 궁중에서 생활하였다. 왕과 특별한 유대 관계를 맺게 되어 물질적 혜택뿐 아니라 신분까지도 높여주었다. 남편과 자식, 친인척까지 면천해 주고 남편과 자식에게 높은 관직을 주기도 하였다. 남편의 지위와 관련 없이 오직 자기 자신의 역할에 의해 봉작을 받는 여성으로 궁녀나 의녀보다 지위가 높았다.

정의
조선시대에 왕의 유모(乳母)에게 내린 외명부 종1품의 작호(爵號).
개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왕자나 왕녀에게 젖을 먹이는 유모가 있었는데, 이 중 특히 왕의 유모를 봉보부인(奉保夫人)이라 했다. 즉 왕자에게 젖을 먹일 당시에는 그저 ‘유모’로 불렸고, 왕자가 왕이 되면 봉보부인으로 책봉되었다. 봉보부인은 원자의 출생과 함께 처음부터 궁중에서 아이를 키운 경우도 있지만 궁 밖에서 종친의 아이를 키우다 훗날 그 아이가 왕이 되어 봉보부인이 된 여성들도 있었다. 봉보부인은 왕을 보살핀 공을 인정받아 매우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또한 왕과 왕비, 왕실의 측근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변천

중국에서 유모를 봉작한 것은 한나라에서 시작되었고, 송나라에서는 진종(眞宗)의 유모 유씨(劉氏)를 진국연수보성부인(秦國延壽保聖夫人)에 봉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진성여왕 때 유모 부호부인(鳧好夫人)의 존재가 보이며, 또 고려 우왕이 유모 장씨를 국대부인(國大夫人)에 봉했다는 이야기가 나와 유모에 대한 봉작이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봉보부인 칭호가 만들어진 것은 조선시대이다. 세종은 중국 제도를 참작해 아보(阿保)의 공을 중히 여겨 유모 이씨를 봉보부인이라 칭하고, 종2품의 품계를 주었다. 그러나 성종대 완성된 『경국대전』에서는 종1품으로 승급되었으며, 인조는 봉보부인이 죽자 2품의 예로써 장사지내 줄 것을 예조에 명하는 등 대우에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봉보부인 제도는 “봉보부인 조종응(趙鍾應)을 4등에 서훈한다( 『순종실록』 권3, 순종 2년 11월 12일)”는 기록으로 보아 대한제국시기까지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내용

봉보부인은 신분상 대부분 천민 출신이었다. 왕실에서는 양반의 처나 첩으로 유모를 삼고 싶어 했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양반가에서도 유모를 필요로 한데다가 내외법 때문이었다. 이에 남녀유별을 따지지 않는 천민을 유모로 삼게 되었다. 종친들은 자신이나 친인척의 여종 중에서 아이를 갓 낳은 여성을, 원자나 대군의 경우는 내수사의 여종 또는 가까운 종실의 여종 가운데에서 산모를 유모로 선택했다.

유모의 가장 큰 역할은 원자에게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며 옷을 갈아입히고 진자리 마른자리를 가려 눕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모가 단순히 아기의 성장을 돕는 것만이 아니라 아기의 인성 형성과 건강에 끼치는 영향이 매우 컸다. 때문에 유모는 젖이 잘 나와야 하고 건강이 좋아야 하며 성격이 온화해야 하는 등 선택 조건이 까다로웠고, 중간에 교체되는 경우도 있었다.

유모는 원자가 3살이 될 즈음까지 궁중에서 생활하다가 이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계속 궁중에서 궁녀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또 궁 밖에서 아이를 보살폈던 유모는 그 집의 노비로서 같이 살다가 자신이 키운 아이가 왕이 되면 같이 궁궐로 들어와 왕과 왕비 옆에서 그들의 시중을 들기도 했다. 왕과 유모는 특별한 정과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시대 왕들은 봉보부인에게 물질적 혜택뿐 아니라 신분까지도 높여주었으며, 모든 행사시에도 예우하였다. 즉 봉보부인은 종 1품의 관직으로 녹봉을 주었으며, 그 외에도 수시로 쌀, 노비, 토지, 옷, 콩, 땔감 등 생활에 필요한 여러 혜택을 제공하였다. 유모 뿐만 아니라 유모의 남편과 자식, 친인척까지도 면천해 주고, 남편과 자식에게 높은 관직을 주기도 했다. 봉보부인이 죽으면 많은 부의(賻儀)도 내렸다. 특히 궁 밖에서 성장하여 어린 나이에 즉위한 성종과 불우한 성장과정을 거친 연산군은 자신의 유모에게 특별대우를 해 주어 신하들로부터 큰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 살아서 봉보부인에 책봉되었던 왕의 유모는 많지 않았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의 여성은 왕실여성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남편의 지위에 따라 봉작을 받았으나 봉보부인은 오직 자기 자신의 역할에 의해 봉작을 받았다. 남편의 지위와 관련 없이 여성이 봉작을 받은 경우로 궁녀의녀(醫女)도 있었지만 봉보부인은 이들보다 지위가 훨씬 높았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봉보부인등록(奉保夫人謄錄)』
「조선 전기 봉보부인의 역할과 지위」(한희숙, 『조선시대사학보』 43, 조선시대사학회, 2007)
「18·19세기 왕실유모의 범위와 위상: 『탁지정례(度支定例)』와 『예식통고(例式通考)』를 중심으로」(박미선, 『사총』73, 고려대 역사연구소, 2011)
집필자
한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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