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나 고려시대 국사 현오(玄梧)가 이곳에 주석하면서 국왕을 강학(講學)하였다는 일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절에 대한 역사는 거의 전래되지 않고 있다.
임진왜란 때 절에서 떠내려 오는 쌀뜨물이 10리 나 흘러내렸기 때문에 왜적이 뭍을 따라 올라가서 절을 불태웠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전라감사 이광(李廣)이 이끄는 근왕병 5만이 이곳에서 왜적과 싸웠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곳이 서봉사임을 알게 된 것은 현오국사탑비의 비각을 건립하는 공사 중 명문와편(銘文瓦片)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사지(寺址)의 크기로 보아 굉장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절은 서북을 등진 동남향으로 배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상 · 중 · 하의 계단식으로 나누어져 있다. 맨 위쪽의 절터가 법당자리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주춧돌과 탑재 등도 흩어져 있다.
현재 이 절터에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와 비각이 있다. 탑비는 1185년(명종 15)에 세운 것이고, 비각은 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1979년에 건립하였다. 특히, 이 절에서는 『인천안목(人天眼目)』 · 『불조삼경(佛祖三經)』 등 10여종의 목판본을 간행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불설예수시왕경(佛說豫修十王經)』은 특출하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은 그 가치를 인정하여 2018년 10월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주변 절터 2만180㎡를 문화재보호구역(현, 국가유산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