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소리 산타령 (선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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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소리산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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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경기 지역과 서도지방에서 불리는 잡가 중 서서 소리하는 선소리의 대표 곡목.
이칭
이칭
산타령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국가무형문화재(1968년 04월 19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목차
정의
서울 · 경기 지역과 서도지방에서 불리는 잡가 중 서서 소리하는 선소리의 대표 곡목.
내용

서울·경기 지역과 서도지방에서 불리는 잡가 중 서서 소리하는 선소리의 대표 곡목.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종류는 경기 산타령과 서도(西道) 산타령이 있고, 각각 <놀량>·<앞산타령>·<뒷산타령>·<자진산타령>으로 되어 있다. <자진산타령>은 경기에서 <도라지타령>이라 하고, 서도에서는 <경발림> 또는 <경사거리>라고도 부른다.

흔히 <산타령>의 시초는 조선 말기 오강(五江)으로 불린 한강·용산·삼개[麻浦]·지호(支湖)·서호(西湖) 등의 소리꾼들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재효(申在孝)의 <박타령>과 <변강쇠타령>에 사당패들이 나와서 <놀량>을 비롯한 <산타령>을 부르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고종 연간의 오강의 소리꾼들을 <산타령>의 시초로 잡기는 어려울 것 같다.

1915년에 간행된 ≪무쌍신구잡가 無雙新舊雜歌≫에는 지금의 <놀량>을 <판염불>이라 하여 “진국명산망장봉에 청천삭출금부용 음도로 시법이라……”고 하여 운문의 불가어(佛家語)로 시작하다가 한참 뒤에야 “산천초목이”가 나온다.

이렇게 <산타령>에 불교와 관계가 있는 <판염불>이 나오는 이유는 창자(唱者)들이 원래는 사당패들로서 수백 년 전부터 민가나 절로 떠돌면서 매창매기(賣娼賣技)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부르는 소리 중에 <산타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뒤 고종 연간에 서울 오강의 소리꾼들이 <산타령>을 불렀다. 이때 의택이 나타나 선소리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 후 의택-종대-신낙택(申洛澤)의 계보로 전승되었다. 신낙택 이후로는 이들의 가락을 서울 주변의 소리꾼들이 익혀 여러 곳에 선소리패가 생겼다. 뚝섬패·한강패·쇠봉구패·용산삼개패·동막패(東幕牌)·성북동패·왕십리패·진고개의 호조(戶曹)다리패·배오개의 마전다리패·과천의 방아다리패·자하문밖패 등이 당시에 이름을 날렸는데, 이 중에 뚝섬패가 으뜸이고 과천의 방아다리패가 그 다음이었다 한다.

뚝섬패에서는 이태문(李泰文)이 신낙택에게 배워 황기운(黃琪運)·이동식(李東植)·이동운(李東運:이동식의 아우)에게 전하였는데, 이들은 모두가 선소리의 명창으로 알려져 있다.

과천패는 소완준(蘇完俊)·한인택(韓仁澤)이 유명하였다. 왕십리패에는 명창 이명길(李命吉)을 비롯하여 하순일(河順一)·엄태영(嚴泰泳)·탁복만(卓福萬)·이명산(李命山) 등이 활약하였고, 진고개의 호조다리패에는 월선(月仙)·김응렬(金應烈)·김병규(金炳奎), 배오개의 마전다리패에는 박삼쇠(朴三釗) 등이 그 이름을 날렸다.

그 뒤 1920·1930년대에 이르러 패의 개념이 차츰 사라지고 대신 원각사나 광무대 또는 극장무대를 중심으로 불렸다. 최석조(崔錫祚)·최정식(崔貞植)·김태봉(金泰鳳) 등이 선소리를 잘하였다. 이명길·엄태영·김태운·최정식 등은 잡가 명창인 최경식(崔景植)·박춘재(朴春載) 등에게 경기잡가를 공부해서 이 무렵부터 선소리 명창이 잡가[座唱] 명창을 겸하게 된다.

전수기관으로는 패들이 활약하던 고종 연간에는 공청(公廳:파움인 경우가 많다)이 소리꾼들의 공연장이요 수련장이었다. 그러다가 민족항일기에는 권번(券番:일제시대에 있었던 기생조합)을 통하여 전수되었고, 광복 뒤에는 최경식이 소속한 대한국악원을 중심으로 전승되었으나, 6·25전쟁을 만나 침체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창배(李昌培)가 청구고전성악학원(靑丘古典聲樂學院)을 만들어 가르치자 많은 신진들이 배출되었고, 특히 1954년에 ≪가요집성 歌謠集成≫을 간행한 뒤 계속 증보시켜 1976년에 ≪한국가창대계 韓國歌唱大系≫를 완성한 뒤부터 완전히 정립되었다. 따라서 <산타령>의 발전과 정립에는 이창배의 힘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서울 강남구에 선소리보존협회를 두고 전수교육을 하고 있다.

1968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이명길에게 배운 이창배, 소완준에게 배운 정득만(鄭得晩), 김태봉의 문하에서 배운 김순태(金順泰), 그리고 유개동(柳開東)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들의 후계자로는 박태녀(朴泰汝)·최창남(崔昌男)·황용주(黃龍周)·윤종평(尹鍾平)·조순자(趙順子) 등이 있으며, 1998년 현재 황용주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다.

서도의 산타령은 서울의 산타령이 옮겨간 것이다. 이는 <산타령>의 시조라 할만한 의택과 종대가 평양에 가서 부벽루에 올라 <산타령>을 불렀는데, 당시의 서도 명창인 허득선(許得善)과 임방울(林芳蔚)이 이를 듣고 모방하여 서도 산타령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서울에도 올라와 서도 선소리를 불러서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서도 선소리는 평양의 날탕패에 의하여 널리 퍼졌는데, 문영수(文泳洙)·이정화(李正華) 등이 유명하였고, 서울에 올라와 원각사에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평양에서는 양세진(梁世振)이 선소리를 잘하였고, 또 김종조(金宗朝)·최순경(崔順慶)·김칠성(金七星)·김주호(金周鎬)·이인수(李仁洙) 같은 서도 잡가의 명창들도 <산타령>을 잘 불렀다. 서울에서는 박춘재·최정식·박인섭·김태운·유개동·김경호·원경태 등 경기소리 명창들이 문영수·이정화에게 서도소리를 배워 일가를 이루었다.

이때부터 <산타령>은 경기·서도의 구별 없이 선소리 명창들이면 다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산타령> 중 <놀량>의 불가어 부분은 오강의 소리꾼들이 부르기 시작하면서 따로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솔·라·도·레·미의 5음계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솔·도·미 3음이 많이 나오며, 장·단3도 진행이 현저하다. <놀량>에서 시작하여 <앞산타령>을 거쳐 <뒷산타령>에 이르기까지 그 한배는 점점 빨라지며 <자진산타령>에 이르러 정점에 도달한다.

그리고 <산타령>에 맞추어 소고를 치며 춤추는 발림춤도 느린 <놀량>에서보다는 빠른 <뒷산타령>과 <자진산타령>에서 더욱 흥이 나게 마련이다. 이렇게 차츰 빨라지는 한배는 마치 <영산회상>이 <상영산>에서 <중영산>·<세영산>을 거쳐 <가락덜이>에 이르는 과정과 비슷하고, 전체적으로 퍽 씩씩한 맛이 난다.

서도 산타령은 경기소리를 배워서 부른 것이어서 경기 산타령과 음악적 특징이 대개 비슷하나, 한배와 리듬이 빠르고 규칙적이며 세련된 무용성(舞踊性)을 띠고 있다.

경기와 서도 산타령을 구성하고 있는 각 곡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놀량:경기 <놀량>은 일정한 형식과 장단이 없고 통절형식(通節形式)이며 넓은 음역을 지니고 고음을 많이 쓴다. 서도 <놀량>은 경기 <놀량>의 후반과 같고 통절형식이며, 처음에는 느리게 시작하다가 점점 빨라지며 세마치·도드리·자진타령장단을 섞어서 친다. 경기 <놀량>을 <구놀량>, 서도 <놀량>을 <신놀량>이라고도 하였다.

② 앞산타령:경기의 것은 서울 근처에 있는 산을 주제로 하고 유절형식(有節形式)이며, 일정한 장단이 없고 고음을 많이 쓴다. 서도의 것은 유절형식에 세마치장단을 쓴다.

③ 뒷산타령:경기의 것은 <중거리>라고도 불리고 유절형식에 리듬과 음역은 <앞산타령>과 같고, 한배는 조금 빠르다. 서도의 것은 유절형식이며, 한배는 경기의 것보다 갑절이나 빠르고, 장단은 일정하지 않지만 4박자의 빠른 타령장단이 나올 때도 있다. 가락은 경기의 것과 거의 같다.

④ 자진산타령:경기의 것은 일명 <도라지타령>으로도 불리고, 처음은 느리게 부르다가 빠르고 경쾌한 4박자 장단으로 바뀐다. <뒷산타령>의 파생곡으로 음악적 특징도 또한 같다. 서도의 것은 일명 <경사거리>·<경발림>으로 불리고 유절형식이며, 그 음악적 특징은 경기의 것과 같고, 선율도 비슷하여 서로 혼동될 경우가 가끔 생긴다. →선소리

참고문헌

『국악개요』(장사훈, 정연사, 1961)
『한국민요집-부립창(付立唱)-』(한만영, 광음문화사, 1967)
『조선해어화사』(이능화, 학문사, 1968)
『국악개론』(장사훈·한만영, 한국국악학회, 1975)
『문예총람』(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6)
『한국가창대계(韓國歌唱大系)』(이창배, 홍인문화사, 1976)
『신재효(申在孝)판소리전집』(강한영, 서문문고, 1977)
「산타령(山打令)에 관한 연구」(한만영, 『음대학보』 5, 서울대학교 음대학생회,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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