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협은 1947년에 설립되었던 신극 단체이다. 1950년 국립극장이 설립될 때 전속 극단으로 출발했다. 창립 공연 「원술랑」(유치진 작)은 5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성공을 거두었다. 제3회 공연을 준비하던 중 6·25전쟁이 일어나 국방부 정훈국 공작대로 편성됐다. 신협은 1950년대의 한국연극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극단을 견실하게 운영했다. 국내 창작극 위주의 공연에 머물지 않고 미국 브로드웨이 계통의 현대극을 본격적으로 공연함으로써 한국 현대연극의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2017년까지 148회의 공연을 가졌다.
신협은 1947에 창립된 극협(劇協)을 전신으로 하여 1950년 국립극장이 설립될 때 전속극단으로 출발하였다. 광복 이후 극협은 우익진영의 대표적 단체로 공연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1950년 국립극장이 설립되자, 초대 극장장인 유치진은 협의체로 신극협의회(新劇協議會)를 발족시키면서, 그 전속극단으로 신협(新協)과 극협을 두기로 한다. 사실상 극협은 이름만 신협으로 바뀌었을 뿐 배우들과 구성원들은 극협 시절 멤버들 그대로였을 뿐만 아니라 극단으로서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신협은 극작가 이광래(李光來)를 간사장으로 이해랑(李海浪) · 김동원(金東園) · 박상익(朴商翊) · 김선영(金鮮英) 등 극협 단원과 주선태(朱善泰) · 오사량(吳史良) · 박제행(朴齊行) · 박경수 · 최삼 · 전두영 · 송재로(宋在魯) 등으로 구성되었다.
1950년 4월 30일에 신협은 광복 직후 좌우익 연극분열의 혼란을 이겨내고 ‘민족연극예술의 수립과 창조’라는 목표를 내걸고 유치진(柳致眞) 작, 허석(許碩) · 이화삼(李化三) 공동연출 「원술랑(元述郎)」으로 창립공연을 가졌다. 이 때 5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2회 공연은 유치진 연출로 조우(曺禹) 작 · 김광주(金光洲) 역 「뇌우(雷雨)」로 호평을 받았으며, 7만 5천여 명이라는 관객을 동원했다. 신협이 제3회 공연을 준비하던 중 6·25전쟁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공연다운 공연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신협은, 1950년 10월 국방부 정훈국 공작대로 편성되어 피난지인 부산 · 대구 · 마산 등지에서 순회공연을 가졌다.
공연작품은 유치진 작 「순동(順童)」 · 「처용(處容)의 노래」등과 셰익스피어 작 「햄릿」 · 「맥베드」 · 「오셀로」 · 「줄리어스 시저」 등, 그리고 사르트르 작 「붉은 장갑」, 몰리에르 작 「수전노」 등 피난시절 2년여 동안 10편 이상의 작품을 공연하였다.
1953년 초에 상경하여 시공관(市公館)에서 유치진 작 「원술랑」 · 「마의태자(麻衣太子)」 · 「나도 인간이 되련다」 등과 윤방일(尹芳一) 작 「은장도」 · 「이슬」, 오상원(吳尙源) 작 「녹쓰는 파편(破片)」 등을 공연하여 활동과 흥행면에서 독보적인 극단임을 입증하였다.
신협은 전쟁 중에 국립극장이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도의 사설극단으로서 활동하였고, 1953년에 대구에서 국립극장이 재발족된 이후에도 유치진 중심으로 국립극장과 무관하게 독자적 활동을 펼쳤다.
1950년대 신협의 공연에 눈길을 끄는 점은 셰익스피어 작품을 많이 공연하였다는 것과, 미국 브로드웨이류의 현대극을 본격적으로 공연하였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유진 오닐 · 아서 밀러 · 테네시 윌리엄스 · 플체데릭 노트 등 미국 현대극작가들이 신협의 공연작품으로 올려졌다. 이로써 우리의 연극이 본격적으로 미국연극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신협은 여러 면으로 관객동원에 노력하였으나, 전란(戰亂) 직후 현실적 상황과 더불어 배우 · 관객이 모두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 사정이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1957년 5월에 라인하트(Mary Roberts Rinehart) · 홉우드(Avery Hopwood) 합작 「박쥐」를 34회 공연으로 올리고 잠시 해산되었다.
휴전된 후에도 대구에 남아 있던 국립극장이 1957년 6월에 환도(還都)하자 대구에 있던 해체된 신협단원들을 불러들여 전속극단으로 다시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명칭을 국립극단으로 지정함으로써 사실상 신협과는 무관하게 되었다.
1958년에 유치진이 해외여행에서 돌아와 국립극단의 옛 신협단원들을 영입하여 극단 신협을 재건하였다. 같은 해 9월에 유치진의 신작 「한강은 흐른다」로 신협 재기공연을 가졌고, 을지로 입구의 소극장 원각사(圓覺社)에서 유치진 작 「소」를 공연하였다.
그러나 1년 후 신협단원들은 국립극장 측의 요청과 생활고 때문에 다시 국립극장으로 복귀하였다. 이들은 국립극장의 전속극단이 되어 테네시 윌리엄스(Tennessee Williams) 작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도스토예프스키 작 「죄와 벌」, 하유상(河有祥) 작 「미풍」 등을 공연하였다.
5·16군사정변 이후 국립극장이 새로 바뀐 규정에 따라 전속극단을 해촉(解囑)하고 새로이 국립극단을 출범시키면서 극단은 국립극장과 완전히 관계를 끊게 되었다. 또한 1962년에 드라마센터가 건립된 이후 유치진 · 이해랑 등 핵심단원들이 드라마센터로 옮기고, 극단 드라마센터를 조직하는 바람에 신협은 해체되었다.
그러나 드라마센터가 1년도 못 되어 재정난으로 문을 닫게 되고, 1963년에 구 신협단원인 이해랑 · 김승호(金勝鎬) · 김동원 · 장민호(張民虎) 등과 영화계의 중견배우인 황정순(黃貞順) · 최은희(崔銀姬) 등으로 단원이 재정비되어 신협은 또 재건되어 차범석(車凡錫) 작 「갈매기떼」로 국립극장에서 재건공연을 가졌고, 이어서 「오델로」와 이만택(李萬澤) 작 「무지개」를 공연하였다.
이후 대다수 극단 단원들이 영화계로 빠져나가 끝내 1950년대의 전성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침체에 빠졌다. 1960년대 당시의 한국연극은 동인제(同人制)시스템의 젊은 극단들이 여러 개 등장한 데다가 전쟁 후의 경제 불황으로 관객동원이 힘든 상황이었다. 따라서 신협도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여 젊은 연기자를 받아들였고, 극본 선정도 기성작가보다는 신인작가의 작품 발굴에 힘썼으며, 외국의 전위극을 취택(取擇)하기에 이른다.
1960년대 후반에 이만택 · 황유철(黃裕喆) · 방영웅(方榮雄) · 오태석(吳泰錫) · 김창활(金昌活) 등 신인작가들의 작품 공연과 미국의 부조리극인 에드워드 올비(Edward Albee) 작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등과 같은 작품이 공연된 사실이 이를 입증해 준다.
1974년에 극단 신협은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젊은 연극인들을 대거 기용하고 서울 퇴계로 5가에 르네상스소극장을 마련하여 소극장 연극운동을 펼쳤다. 공연작품은 윤대성(尹大星) 작 「어쩌면 좋아」, 오학영(吳學榮) 작 「생명은 합창처럼」, 김흥우(金興雨) 작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등이 있다.
한편으로는 대극장 공연도 병행하면서, 초창기 단원들이 대표를 맡는 등 신협의 정신을 계승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대부분 단원들이 다른 극단이나 영화계 · 방송계 등으로 분산되었기 때문에 신협 본래의 뜻을 살릴 수는 없었다.
대표적인 공연 작품으로는 유치진 작 「조국(祖國)」 · 「자명고(自鳴鼓)」 · 「대춘향전(大春香傳)」 등과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포함한 작품들, 테네시 윌리엄스 작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아서 밀러(Arthur Miller) 작 「세일즈맨의 죽음」, 유진 오닐(Eugene Gladstone O'Neill) 작 「느릅나무 그늘의 욕망」 · 「밤으로의 긴 여로」, 또스또예프스키(Dostoyevsky) 작 「죄와 벌」 등 현재까지 148회의 공연을 가졌다.
1979년 노경식 작, 이창구 연출 「탑」으로 제3회 대한민국연극제에, 1982년 김정률 작, 심회만 연출 「터」로 제6회 대한민국연극제에, 1986년 유진 오닐 작, 이해랑 연출 「밤으로의 긴 여로」로 제10회 대한민국연극제에 참가한 바 있으며, 2007년에는 창단 60주년 기념 공연으로 사르트르(Jean-Paul Sartre) 작, 오세곤 역, 채승훈 연출 「더러운 손」을 필두로 콜드웰(Erskine Caldwell) 작, 이창구 연출 「타바코로드(Tabacco Road)」, 셰익스피어 원작, 경상현 연출 「KING & HAMLET」, 하유상 작, 전세권(全世權) 연출 「스승과 그 자제의 꿈」 등 4작품을 연이어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2017년 안치용 연출로 창단 70주년 기념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1950년대의 한국연극계의 독보적인 존재였던 신협은 극단을 견실(堅實)하게 운영했을 뿐만 아니라, 레퍼토리 면에서도 국내 창작극 위주의 공연에 머물지 않고 서양 연극을 소개하고, 미국 브로드웨이 계통의 현대극을 본격적으로 공연함으로써 한국 현대연극의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현재의 활동은 미미(微微)해졌지만, 신협은 현존하는 극단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신극단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