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령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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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약령시 한방테마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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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학
제도
각종 약재를 교환, 매매하는 시장.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약령시는 각종 약재를 교환, 매매하는 시장이다. 예로부터 약재의 주요 산지라고 알려진 경상도·강원도·전라도에서 집산에 편리한 주읍인 대구·원주·전주의 3개 소에서 약령시를 개시했다. 약령시가 개시하면 관리가 나와 인삼과 같은 조공약재와 조정에서 필요한 약재를 매입했다. 처음에는 각종 약재의 채집·집합 사정상 월령에 따라 몇 차례 열렸다. 그 뒤에는 관례적으로 봄·가을 두 차례 열렸다. 가장 규모가 크고 대표적인 것은 1658년(효종 9)에 시작된 대구약령시이다. 오늘날에도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를 세칭 ‘약전골목’이라 부르고 있다.

목차
정의
각종 약재를 교환, 매매하는 시장.
내용

‘영시(令市)’라고도 하는데 그 이름의 뜻에 대하여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관(官)의 명에 따라서 개시(開市)하였기 때문에 영시 또는 약령시라 하였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향약재(鄕藥材: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약재)를 채취하는 기준을 월령이라 하는데 월령, 즉 계절에 따라서 열리는 시장이라는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전자로 생각되고 있다.

약령시가 생기게 된 배경은 옛날부터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들어오는 약재, 즉 당약(唐藥, 또는 唐材)이 많이 쓰였는데 조선 초기부터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재, 즉 향약(鄕藥)의 당약과의 비교연구와 그 자급자족을 위하여 채취와 재배가 각지에서 장려되고 성행하였다.

이렇게 생산된 약재는 지방관에서 중앙관아, 주로 제생원(濟生院, 뒤에 혜민서(惠民署)) · 전의감(典醫監) · 내의원 등에 윤납 진상(輪納進上)되어 그 수요에 충당되고, 민간에는 잉여품 또는 자가채취, 재배한 것이 쓰이었다.

그러나 중종 이후 임진왜란 때까지 의약계는 다시 당약 사용이 많아져서 약전(藥田)은 황폐하였다. 그러나 공납(貢納)은 계속되었고, 약재의 상납에는 여러 가지 폐단, 즉 약재의 부패와 여기에 관여하는 관리의 사기, 권력자의 만착(瞞着:속임)이 공납하는 사람을 괴롭혔다. 또 임진왜란 뒤 청나라에도 약재가 부족하였던 관계로 다시 향약의 자급자족이 장려되었다.

한편으로는 일반 공납에 대한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대동법이 생기고 약재 공납도 대동법에 따라서 거래질서를 잡기 시작한 것이 약령시가 생기게 된 배경이다. 어떻든 약령시가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존속, 발전하였다는 것은 세계 약학사에서 특기할 만한 일이다.

또 약재는 쌀이나 다른 곡물과는 달리 채취 · 보존 · 진위양부(眞僞良否)의 감별이 특수한 기능을 필요로 하는데, 그 집합공납거래에 특별한 기구로 생긴 것이 약령시 기원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효종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약령시는 예로부터 약재의 주요 산지라고 알려진 경상도 · 강원도 · 전라도에서 집산에 편리한 주읍인 대구 · 원주 · 전주의 3개 소에서 먼저 개시하였는데 약령시가 열리면 관리가 나와 청나라에 보내는 약재, 즉 조공약재(朝貢藥材, 주로 인삼)와 우리나라 조정에서 필요한 약재를 매입하였다.

인삼은 그 도의 심약(審藥: 약을 심사하는 관리)이 이를 책임졌으며, 기타 중요한 약재는 접장(接長: 보부상의 우두머리)이 심사, 매입하였으며, 관의 구매가 끝난 다음 일반인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약령시는 그 도의 관찰사의 관리에 속하였고, 감령이 약령시에 관한 시설 · 취재 · 재판 등을 관장하였으나 갑오개혁(1894년) 뒤에 이 일은 없어졌다. 약령시는 처음에는 각종 약재의 채집 · 집합 사정상 월령에 따라 몇 차례 열렸다고 생각되는데, 뒤에는 봄 · 가을 두 차례 열리는 것이 관례로 되었다.

약령시 중에 가장 규모가 크고 대표적인 것이 대구 약령시였다. 대구약령시는 1658년(효종 9)에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 뒤 오늘날까지 면면히 계속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중국 · 일본 · 인도 · 중동 · 아프리카 · 유럽 등의 약재도 집합하여 국제화되기도 하였다. 음력 2월과 10월에 두 번 열리는데 이때에는 전국 각지에서 약초재배자 · 채취자 · 상인과 약재수요자가 모여들어 성시(盛市)를 이룬다.

오늘날에도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를 세칭 ‘약전골목’이라 부르고 있다. 대구 이외에 원주 · 전주 · 공주 · 진주 · 청주 · 충주 · 대전 · 개성 · 제천에서도 개시하였으나 그다지 번창하지는 못하였다.

참고문헌

『한의약서고』(김신근,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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