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경지 ()

조선시대사
제도
군현(郡縣) 등 지방 행정 단위의 소속 영역 중 다른 지방 행정 단위의 영역을 넘어 들어가 위치한 지역.
이칭
이칭
월입지(越入地), 비입지(飛入地), 비월지(飛越地), 비지(飛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월경지는 군현 등 지방 행정 단위의 소속 영역 중 다른 지방 행정 단위의 영역을 넘어 들어가 위치한 지역이다. 월입지(越入地), 비입지(飛入地), 비월지(飛越地), 비지(飛地)라고도 한다. 후삼국시대부터 나타나 조선시대까지 폭넓게 분포하였다. 전국 각지에 100여 곳 이상 존재하던 월경지는 1906년에 지방 행정구역 개편을 통하여 대부분 소멸되었다. 현대에도 지방 행정구역의 개편 및 조정의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될 때 발생하거나 유지되고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이서면이나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다사읍과 하빈면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정의
군현(郡縣) 등 지방 행정 단위의 소속 영역 중 다른 지방 행정 단위의 영역을 넘어 들어가 위치한 지역.
개설

월경지(越境地)는 월입지(越入地), 비입지(飛入地), 비월지(飛越地), 비지(飛地)라고도 한다. 한국사 속에 발생했던 월경지는 일찍이 후삼국시대부터 자료에 그 존재가 나타난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면, 전국 각지에 크고 작은 월경지가 폭넓게 분포했음이 확인된다. 조선시대의 월경지는 각종 지리지와 고지도를 통해 어느 정도 그 위치와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그에 기초하여 고려시대의 월경지를 고증할 수도 있다.

월경지의 발생과 유지에는 다양한 원인이 개입된다. 지방 행정구역의 신설과 개편, 조정의 과정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재난이나 전란, 경작지 개척 등의 이유로 주민들이 이주하면서 발생하기도 한다. 한국사 속에 나타났던 월경지는 ‘발생 원인과 지리적 입지’, ‘발생 기원 단위’ 등의 두 가지 기준을 가지고 복합적인 관점에서 분류할 수 있다. 한번 설정된 월경지는 본읍에서의 강렬한 집착 등이 지속되어 오랫동안 유지되는 경향을 보였다. 조선시대의 월경지는 상당수가 고려시대로부터 기원한 곳들이다. 조선 후기까지도 전국 각지에 100여 곳 이상 존재하던 월경지는 1906년(광무 10) 지방 행정구역 개편을 통하여 대부분 소멸되었다. 다만 일부 월경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가 1914년 일제의 지방 행정구역 개편으로 완전히 소멸하였다.

그런데 월경지가 전근대시기의 소산인 것만은 아니다. 현대에도 지방 행정구역의 개편 및 조정의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될 때 월경지가 발생하고 유지된다. 지금도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대구광역시 달성군에는 읍 · 면 단위의 월경지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외 몇몇 지역에서도 여전히 월경지적 입지를 지닌 곳들이 확인된다.

내용
  1. 월경지의 개념

월경지는 군현과 같은 지방 행정 단위의 소속 영역 중 다른 군현의 영역을 넘어 들어가 위치한 영역을 의미한다. 월경지를 규정하는 대표적인 자료는 1906년 9월 28일 「칙령(勅令) 제49호」(이하 칙령 49호로 표기)이다. 당시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비입지(飛入地)와 두입지(斗入地)를 정리하여 부근의 군(郡)에 이속시키는 지방 행정구역의 정비를 단행하였다. 「칙령 49호」에서는 “비입지는 갑군토가 월재을군한 자를 위함이니, 잉속토재군하며, 두입지는 병군토가 침입정군한 자를 위함이니 이속부근군함이라(飛入地는 甲郡土가 越在乙郡ᄒᆞᆫ 者ᄅᆞᆯ 謂ᄒᆞᆷ이니, 仍屬土在郡ᄒᆞ며, 斗入地ᄂᆞᆫ 丙郡土가 侵入丁郡ᄒᆞᆫ 者ᄅᆞᆯ 謂ᄒᆞᆷ이니 移屬附近郡ᄒᆞᆷ이라)”고 규정하였다. 월경지를 비입지로, 견아상입지(犬牙相入地)를 두입지로 표현하였다.

한국사 속에 존재했던 월경지의 전국적 분포를 정리한 자료로는 조선 초기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가 가장 오래되었으며, 『동여도』『대동여지도』 등 19세기에 편찬된 전국지도, 1906년 9월 24일 대한제국 관보(官報)에 실린 「칙령 49호」 등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경상도지리지』 등 조선시대에 편찬된 지리지류, 조선 후기에 편찬된 『호구총수』, 일제 강점기에 발행된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 『신구대조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 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등의 자료를 활용하면 월경지의 면모를 복원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고지도나 지리지 자료 등에 기록되어 있는 조선시대 월경지의 면모는 GIS 기법을 활용하여 현재의 지도 위에도 비교적 정밀하게 복원할 수 있다.

조선시대 전국에 분포했던 월경지의 숫자는 100여 곳 이상으로 헤아릴 수 있다. 그런데 개별 월경지의 영역 단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월경지의 숫자는 증감될 수 있기 때문에, 월경지의 숫자를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은 그리 큰 의미가 없다. 현재의 면 2~3개를 합친 정도로 큰 영역의 월경지도 존재했지만, 대부분의 월경지는 현재의 리 몇 개를 합친 정도의 영역이거나 그보다 더 작은 크기의 영역을 가진 곳도 있었다. 월경지의 개략적인 위치와 분포는 『동여도』와 『대동여지도』 등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지도에는 누락되거나 영역 왜곡이 있는 월경지가 적지 않다.

전근대시기 우리나라의 월경지는 그 시초가 늦어도 후삼국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태봉(泰封)의 장수였던 왕건(王建)이 나주 지역을 경략하였는데, 나주 지역은 태봉의 본 영역과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월경지에 해당한다. 그 이전 시기에도 월경지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다. 이후 고려시대에도 월경지는 광범위하게 분포하였다. 조선시대의 월경지 중에서도, 고려시기부터 월경지로서 존재하였던 곳이 조선시대에 새로이 월경지가 된 곳보다 훨씬 더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 월경지의 생성과 지속

고려시대 월경지의 전국적 분포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현재 알려진 것이 없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월경지로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곳들은 제한적이다. 속현(屬縣)이었거나, 향(鄕) · 부곡(部曲) · 소(所) · 역(驛) 등이었던 곳들 중심으로 파악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군현은 지방관이 파견되었던 주현(主縣)과,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고 주현의 관할 하에 있었던 속현으로 나눌 수 있다. 고려 중기부터는 주현의 관할 하에 있던 속현의 승격, 독립이 증가하면서, 주현의 관할 범위 가장자리에 있던 속현이나 향 · 부곡 등이 주현의 월경지로 남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지방제도의 정비가 마무리되는 조선 초기까지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조선시대 경주나 안동, 전주와 나주, 청주와 홍주(洪州) 등 대읍(大邑) 소속의 월경지 중에 이러한 사례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속현과 향 · 부곡 · 소 등이 집중 분포하였던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의 사례를 분석해보면, 조선시대 월경지 중에 과거 속현이나 향 · 부곡 · 소 등이었던 곳의 비율은 50% 이상으로 비교적 높은 편에 속하나, 고려시대에 존재하였던 속현이나 향 · 부곡 · 소 중 조선시대에 월경지로 편성되었던 곳의 비율은 불과 10%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속현이었던 곳이 주현(主縣)으로부터 독립하거나 승격하는 과정에서, 읍세(邑勢)의 확장을 위해 타 군현 소속의 영역을 편입시키면서 월경지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충청도 청산(靑山) 소속의 주성면(酒城面), 경상도 칠원(漆原) 소속의 구산면(龜山面)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사례는 대부분 중앙정부의 의지가 강력히 반영되어 발생한 월경지로서 속현의 승격과 독립이 다수 이루어지는 고려 후기부터 주로 확인된다.

한편 경상도 순흥(順興) 창락역(昌樂驛)은 고려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변함없이 월경지로 존재했던 대표적인 경우이다. 창락역은 죽령 이남의 교통 요지였던 까닭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군현인 풍기(고려시대에는 기주) 대신 좀 더 규모가 컸던 군현인 순흥의 월경지로 편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200여 년 이상 순흥이 혁파되었을 때에는 창락역이 풍기 소속이 되었지만, 1683년(조선 숙종 9) 순흥이 복구된 후 창락역은 다시 순흥 소속의 월경지가 되었다. 월경지 영역에 대한 본 군현의 집착은 그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창락역 외에 괴주(현 괴산) 소속이었던 안부역(安富驛)과 단월역(丹月驛) 등도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월경지였으나, 안부역은 1429년(조선 세종 11)에 연풍(延豐)으로, 단월역은 1433년(세종 15)에 충주(忠州)로 각각 소속이 바뀌면서 월경지적 입지로부터 벗어났다. 조선 초기에는 중앙정부에서 월경지의 숫자를 축소하려고 군현 영역의 변경을 계획한 바 있지만, 의도한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월경지의 영역과 주민에 대한 본 군현의 집착이 강렬했기 때문에, 중앙정부에서도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쉽게 소속관계에 변화를 주는 것을 주저하였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월경지 중 대부분은 조선 후기에도 그대로 월경지로 존속하였다.

또한 특산물을 생산하던 고려시대의 소(所)나 말을 기르던 조선시대의 목장 중에서도, 순흥의 창락역과 같이 국가적 필요에 의해 정책적으로 월경지로 편성되는 경우가 확인된다. 충청도 홍주(洪州) 상전면(上田面)은 고려 후기에 상전소(上田所)가 홍주의 월경지로 편입된 곳인데,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월경지로 유지되었다. 전라도 나주의 망운목장(望雲牧場)이나 지도(智島) 역시 목장이 설치되어 나주의 월경지가 된 곳들이다.

월경지의 생성과 존속에 있어서 군현 주민의 이주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재난 등의 이유로 인하여 새로이 개척된 신 거주지는 월경지로 존속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주와 영암, 해남의 영역 속에 산발적으로 존재하였던 전라도 진도의 월경지 3곳은 고려 말기 왜구의 침략 시에 주민 이주로 만들어진 월경지이다. 조선시대 충청도 천안(天安)의 신종면(新宗面)과 덕흥면(德興面), 돈의면(頓義面), 평안도 가산(嘉山)의 애도(艾島), 평안도 운산(雲山)의 고운산면(古雲山面) 등은 고려 후기 몽골의 침략 시에 주민이 이주한 곳에 만들어진 월경지로서, 조선시대까지 월경지로서 그대로 지속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월경지가 생성된 곳이 있었다. 함경도 북방에 위치한 온성(穩城)과 경원(慶源)은 조선 초기에 개척한 북방 6진에 속하는 지역으로, 바다에 접해 있지 않은 군현이었다. 그런데 동해안에는 이 두 군현 소속의 월경지가 편성되었다. 중앙정부에서 내륙 지역의 군현에 특별히 바닷가 월경지를 편성해준 조치의 결과이다. 1684년(숙종 10)에 설치된 군현인 함경도 무산(茂山)의 경우에도, 바닷가에 월경지가 편성되었다.

평안도 순천(順川)의 경우, 월경지가 본 영역보다 더 넓은 특이한 경우이다. 월경지 영역은 순천의 전신인 고려시대 순주(順州)의 중심지가 있던 곳이었다. 비록 조선시대에 새로운 곳에 순천의 중심지가 건설되었지만, 옛 순천의 땅을 그대로 월경지로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타 군현 영역의 중간 개재 없이 하천이나 하천의 하구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본 군현의 영역도 월경지로 인식하였다. 조선시대 경상도 성주(星州)의 노장곡방(蘆長谷坊)이나 현풍의 진촌면(津村面) 등이 그에 해당한다. 또한 타 군현 소속의 영역이 중간에 개재되어 있는 본 군현 소속의 해도(海島) 역시 월경지로 간주되었다. 전라도 나주 소속의 서남해상 섬들인 암태도자은도, 장산도, 도초도, 그리고 멀리 흑산도 등은 나주 본 영역과 분리된 바다 한 가운데의 섬들이다. 나주 본 영역과 이 섬들 사이에는 무안이나 영암 등의 군현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 섬들은 월경지에 해당한다. 『대동여지도』와 같은 고지도에도 월경지로 표시되어 있다. 이 섬들이 나주의 월경지가 된 이유는 영산강 수로와 바다를 거쳐 연결되는 접근성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한편 전라도 지역의 망운반도와 해제반도는 육지로 가까이 있는 무안 대신, 각각 영광과 함평 본 영역과 분리된 월경지로 존속하였다. 이 역시 육로로의 접근성보다 해로로의 접근성이 반영되었던 결과일 것이다.

조선시대 월경지의 지역 분포 중 주요 특징은 몇몇 지역에 월경지가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곳들이 있다는 점이다. 경기도에서는 현재의 화성과 평택 일대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수원과 양성, 남양 일대에 월경지가 집중적으로 위치하였으며, 충청도에서는 아산만삽교천 근방에 천안과 홍주 소속의 월경지가 집중 분포하였다. 전라도에서는 전주 일대, 그리고 영산강 하구와 망운반도, 해제반도, 해남반도와 광주 등지에 다수의 월경지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경상도에서는 경주와 그 주변 지역, 그리고 안동과 봉화, 영천(榮川), 순흥, 풍기 등 낙동강 상류 지역에 다수의 월경지가 집중 분포하였다. 전국적으로는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 월경지의 숫자가 월등히 많았으며, 나머지 지역에는 월경지의 숫자가 비교적 적었다.

<지도1> <지도2>

  1. 월경지의 유형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사 속에서 월경지는 다양한 시기, 다양한 조건 속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생성, 지속, 그리고 변동, 소멸되었다. 과거 조선시대 월경지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행한 이수건(李樹健)은 조선시대의 월경지 유형을, ①주읍(主邑) 소속 임내(任內)의 분리 독립, ②임내의 이속(移屬), ③과거의 연고(緣故), ④어염(魚鹽) 등 물자조달, ⑤해안(곶)[海岸(串)] · 도서지방(島嶼地方)에 대한 열읍(列邑)의 분점(分占), ⑥조운과 조창 등 여섯 가지로 구분하였으며, 그 중 ①③의 유형을 고려시대의 특징을 갖고 있는 월경지로 이해하였다. 이수건의 이와 같은 분류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월경지의 면모를 전국적인 차원에서 상세하고 종합적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탁월한 성과라 할 수 있지만, ③⑥의 유형 중에서 ①과 ② 유형에도 속하는 곳들이 다수 존재하는 등, 월경지의 발생과 존속에 있어서 각 유형의 성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측면을 함께 고려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 까닭에 ‘발생 원인과 지리적 입지’, ‘발생 기원 단위’라는 두 가지 기준을 가지고 월경지 유형을 분류하는 대안이 제시되었다. 두 가지 기준을 복합적으로 적용하여 개별 월경지의 성격과 기원을 보다 입체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한 시도인 것이다. ‘발생 원인’과 ‘지리적 입지’는 서로 이질적인 개념이지만, 두 개념은 군현 본 영역과 월경지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특징적 요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개념은 모든 월경지에 적용시키는 데에 불완전한 면이 있다. 월경지 중에는 발생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곳도 많으며, 입지의 지리적 특수성이 명확히 나타나지 않는 곳들도 있다. 그런 까닭에 하나의 분류 기준으로 통합하여 설정할 필요가 있다. 특히 ‘발생 원인’과 ‘지리적 입지’는 월경지의 생성과 유지, 변동에 있어서 관련성을 맺는 경우가 많으므로, 서로 보완적인 요소로 삼아 하나의 기준으로 통합이 가능하다.

우선 ‘발생 원인과 지리적 입지’의 기준에 의해서는, ①고려시대 대읍의 관할 범위 외곽에 위치하던 속현이나 향, 부곡, 소 등으로서 조선시대에 해당 대읍의 월경지가 된 경우, ②중소규모 군현의 읍세 확대를 위해 월경지로 설정된 경우, ③이웃 군현 1~2곳의 영역이나 경계 지역 내부에 월경지가 형성된 경우, ④하천이나 바다 건너편에 월경지가 위치한 경우, ⑤중간에 끼어든 타 군현 소속 영역으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월경지가 발생한 경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또한 ‘발생 기원 단위’의 기준에 따라서는 ①군현 기원형, ②향 · 부곡 기원형, ③국가 특수 목적 기원형, ④일반 촌락 기원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변천과 현황

조선 전기에 월경지로 존속했던 곳들 중 대부분은 조선 후기까지도 월경지로 존속하였다. 조선 전기의 월경지 중 전라도 금산(현재는 충남 금산)에 속했다가 무주로 이속된 월경지 등 몇몇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월경지는 조선 후기까지 별다른 변동 없이 월경지로 존재하였다. 그러한 월경지들이 전면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1906년 「칙령 49호」의 발표를 통해서였다. 「칙령 49호」에서는 전국의 월경지들을 모두 인접한 지역에 소속시켜 소멸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월경지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경기도 양지, 충청도 홍주와 공주, 전라도 강진과 흥덕, 광주, 창평, 경상도 진주, 영천(榮川), 흥해, 신녕 등의 몇몇 월경지는 1914년 일제의 지방행정구역 개편 때가 되어야 완전히 월경지적 입지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또한 「칙령 49호」는 월경지를 없애기 위해 지방 행정구역 조정을 시행한 법률임에도 불구하고, 그 조정으로 인하여 경상남도 양산 외남면(外南面)이 새로운 월경지가 되어 1914년까지 존속한 사례도 확인된다. 현재도 지방 행정구역의 조정과 변동, 지역 주민들의 이해 관계 등에 따라 월경지가 불가피하게 생겨나고 유지되는 경우가 존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오랜 기간 동안 한국사 속에 존재했던 월경지는 여말선초와 같은 어느 한 시기에 한꺼번에 생겨난 것도 아니고 발생 원인을 어느 한두 가지 이유에서만 찾을 수도 없으며, 각 월경지 별로 규모나 입지, 그리고 층위도 다양하였다. 월경지가 전근대적 지방 제도 운영의 산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현대에도 월경지가 발생 ·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월경지는 반드시 전근대적인 제도라고만 이해할 수 없다.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이서면이나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다사읍과 하빈면의 경우는 현재도 대한민국의 영토 내에 읍면 단위의 월경지가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므로 월경지의 발생과 유지는 지역 간 이해관계의 반영 속에서 생성되는 불가피한 현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월경지의 생성이나 존속 유무만을 가지고 월경지가 갖는 역사성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월경지의 생성, 유지, 변화, 소멸의 근거와 시대적 상황을 분석하고 중앙정부의 정책적 지향이나 지방사회의 동향을 검토하는 것이 동반되어야, 한국사의 전개 속에서 각 시기별, 지역별로 나타났던 월경지의 역사적 의미를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월경지에 대한 분석과 해석은 단순히 문자로 된 사료의 독해만으로는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다. 사료에 실린 내용을 지리적 공간 속에 펼쳐서 재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GIS와 같은 연구방법론이 도입되고, 그것을 시각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컴퓨터 소프트웨어도 연구에 활용되고 있는 만큼, 앞으로도 전근대시기 한국사 속에서 월경지가 갖는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토대가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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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정요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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