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평동산성은 대전광역시 서구에 있는 삼국시대 성곽이다. 갑천 동안의 구릉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데 백제의 노사지현이 있었던 곳이다. 산성에서 서쪽으로 유성 일대가, 동쪽으로 대전 시내 일대가 조망된다. 성벽 대부분은 붕괴되었으나 문지와 석축의 흔적은 뚜렷하게 남아 있다. 문지는 동문터, 서문터, 북문터 3개소가 있다. 성 내부에서 백제토기편이 수습되어 백제가 축조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산성과 월평동유적지에서 고구려 토기도 출토되었다. 이는 5세기 고구려가 월평동산성 일대까지 진출하였던 사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갑천 동안의 구릉 정상(해발 138m)에 위치하고 있다.
대전에서 유성으로 진입하는 길목으로 공주로 가는 옛길이 지나가는 곳이다. 산성에서는 서쪽으로는 유성 일대가 동쪽으로는 대전 시내 일대가 조망된다. 성벽은 대부분 붕괴되었으나 문지와 석축의 흔적은 지표상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문지는 모두 3개소로 추정된다. 동문터의 너비는 500㎝이고, 서문터는 너비 360㎝이며, 북문터는 너비 300㎝이다. 북문터 부근에는 성에서 가장 낮고 평탄한 곳이 있는데 이곳에 저수나 집수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산성을 정밀측량한 도면이 없어 정확한 규모는 파악하기 어렵다. 전체 둘레는 약 745m로 파악된다. 성 내부에서는 백제토기편이 수습되어 백제가 축조하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2001년에 남벽 일부 구간과 고대지 일대가 발굴되었다.
월평동산성이 위치한 곳은 백제의 노사지현(奴斯只縣)이 있었던 곳이다. 그 때문에 월평동산성을 노사지현의 현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백제부흥군이 활동하였던 내사지성(內斯只城)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근에 있는 구성리산성을 노사지현성과 내사지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발굴조사된 월평동산성의 서벽은 기초부를 진흙과 석재를 섞어 다져서 조성하였다. 먼저 폭 14m 규모로 작은 돌과 진흙을 섞어 다지고 다시 그 위로 폭 15m 정도 다듬지 않은 큰 돌과 진흙을 섞어서 다져 올렸다. 기초부 위에 조성된 성벽은 토축부와 석축부로 구분되는데 토축부는 성벽 내부에 판축하여 조성하였으며 여기에 기대어 외벽쪽은 석축을 하였다. 외벽 축조에 사용된 면석은 대부분 화강암을 정방형에 가깝게 치석하였다.
고대지는 산성의 남서 모서리부분에 있다. 전투시 지휘소인 장대를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축조한 것이다. 풍화암반 위에 마사토와 회갈색 사질토를 1∼5㎝ 두께로 겹겹이 다져 올려서 조성하였다. 높이는 480㎝, 하단 폭은 750㎝, 상단 폭은 300㎝ 정도이다.
일부지역에 대한 제한적인 발굴조사만 이루어져 축조 시기와 성격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출토 유물을 통해 봉 때 6세기 중엽에 축조되어 통일신라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월평동산성 남벽에서 남동쪽 약 150m 정도 떨어진 곳에 해발 약 135m 구릉이 있다. 1994년 이곳에 정수장이 확장되면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백제와 고구려가 축조한 목책, 방어호, 석축성, 목곽저장고, 신라 돌덧널무덤 등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6∼7세기 백제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월평동유적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방어와 저장을 위한 시설로 보아 방어시설이 분명하다. 아직 월평동산성과 월평동유적이 하나로 연결된 산성인지 아니면 각각 다른 시기에 사용된 산성인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이것을 하나의 산성으로 보아 이 두 유적을 합쳐서 월평산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출토 유물로 보아 먼저 월평동유적이 만들어지고 이 보다 좀 늦은 시기에 월평동산성이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직 월평동산성이 월평동유적에서 확대된 것인지 월평동유적에서 축소하여 산성을 다시 축조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월평동산성과 월평동유적에서는 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 토기도 출토되었다. 이는 고구려가 5세기 후반경 대전지역까지 진출하였던 사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된다. 안성 도기동 산성, 청원 남성골산성( 청원 남성골 고구려유적) 등 5세기 고구려의 남진 경로로 추정되는 곳에서도 고구려의 유물이 출토되어 월평동산성 일대까지 고구려가 진출하였던 사정도 점차 규명되고 있다.